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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l 31. 2022

나의 초능력들 9

부채질 : 가장 정확한 노동의 대가

아날로그는 힘이 세다


나는 부채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는 일을 할 줄 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에서 나오는 차가운 공기를 애써 피하지는 않으나 즐겨 맞이하지도 않는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유난을 떨지는 않지만 혼자 있는 경우 직접 리모컨을 찾아 누르는 경우는 없다. 무턱 댄 전기요금 걱정이나 더위에 무딘 육체의 적응력이라기보다도 인공의 기운을 썩 달가워하지  않아서다. 사실 결정적인 이유는 부채라는 도구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 때문이다.


부채는 팔이 움직이는 딱 그만큼만 바람을 안겨준다. 참으로 정직하다. 내가 손에 쥐고 움직이지 않으면 부채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다. 사람들이 더운 날 부채를 찾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팔을 움직이면 그 노동으로 형성된 땀을 부채의 바람이 이겨내지 못한다고 지레짐작을 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부채를 촤르르 편 후 다섯 손가락으로 부채를 첼로의 현을 잡듯 우아하게 파지 하면 한지 속에서 꽃 향기가 퍼지고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한시가 흘러나온다. 이 광경을 보노라면 이내 부채질은 노동의 몸짓에서 예술적 몸놀림이 된다. 몰입에 어찌 수고로움이 끼어들 여지가 있을까. 그 틈 사이로 새들이 날아들고 우주의 계절이 파도치는데!


부채질의 바람이 미약하다 코웃음 치지 마시라. 뜨거운 국밥의 열기를 다스리는 것은 따뜻한 입김이고 불난 집에 부채질은 적지 않은 치명타가 되기도 한다는 걸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작은 바람의 위력이여!


우리의 몸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아날로그였다. 디지털은 우리의 육체를 장악해서 휘두르지만 아날로그는 굴복시키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을 쓰다듬어 마음을 안정시킨다. 디지털에만 노출된 육체는 차가워지고 날카롭게만 만들 뿐이다. 부채질은 냉방병의 덫에 걸릴 일도 없고 밤새 가까이한들 호흡곤란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서른 개의 대나무살로 덧대어진 부채를 가지고 바람을 만드는 것이다.

방금 만든 신선한 바람은 오직 나만의 것이고 매번 부서지고 일어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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