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가기 : 공간이 지닌 기능 너머의 가능
영화관에서는 영화만 있었을까
빛이 주인이 되는 공간이다.
소리도 빛을 거드는 심부름꾼일 뿐 소리는 어차피 영원한 조연에 머문다.
극장 안에서는 시선만 유용하다.
두 개의 눈만 쓸모가 있다.
극장에서는 필름이 돌아가는 러닝타임의 구간보다 그 전후가 더 강렬하다.
잔잔한 적막에서 폭풍이 쓸고 간 폐허의 공간 사이를 모두 가진 장소가 된다.
나의 소소한 즐거움은 영화보기가 아닌 영화관 가기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영화관 좌석에 앉아 있기다.
광고가 없는 영화 시작 전의 좌석에서는 사막을 쓸쓸하게 가로지르는 낙타의 심정이 된다.
오아시스를 떠나 모래바람이 흩날리는 사막 위를 걷고 있는 낙타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지금! 이 발걸음의 순간들만이 진실의 시간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온몸이 천근 만근이 되어도 낙타는 다음에 올 오아시스의 거리를 염려하지 않는다.
여기! 네 발이 딛고 있는 이곳이 진심의 공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시선을 게을리하면 아무 일도 아닌 유희가 된다.
눈만이 바빠지는 시간.
가끔은 눈을 쉬게 하기도 한다.
영사기는 바쁘게 돌아가도 나의 눈을 스크린 천 밖으로 돌려 밀쳐내기도 한다.
비로소 소리만 남게 된다.
나의 시선은 제 갈길을 잃어버리기 시작하자 또 다른 여행이 펼쳐진다.
모든 영화는 판타지다. 심지어 다큐멘터리까지도.
사실이라는 실체가 자신의 몸을 단장할수록 더욱 사실 너머의 판타지로 탈바꿈한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었나.
길을 잃으면 잃을수록 영화의 맛은 독특한 개인의 취향으로 돌아온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영화관의 좌석이 가장 아깝다.
이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은 영화관람료의 8할을 놓치는 일이다.
쿠키 영상이 없다 할지라도 노다지가 있다.
판타지의 공간에서 실세계로 넘어가기 전의 경계가 되는 시간이다.
여기에서 획득하는 기분과 영감, 그리고 곧 휘발될 감동의 잔상들을 차분히 복기해본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극장에 한참이나 이르게 들어와 앉아서 가장 늦게 나가는 일이다.
영화관은 영화만 보는 공간이 아니라고 나만 철통같이 믿기 때문이다.
예배와 미사가 끝난 교회와 성당에 남아 그 고요하고 적막한 공간에 나를 놓아본 적이 있는가.
공간이 가진 고유의 기능을 쉬고 있을 때 그 공간은 어떻게 매력적으로 존재하는지 느껴본다면 극장에 갈 때 상영시간보다 여유 있게 서두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