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Aug 03. 2022

나의 초능력들 12

빗소리 듣기 : 대상을 만나야 존재가 드러나는

빗방울은 세상을 악기로 만들고


어젯밤부터 세차게 내리던 비는 밤새 천둥과 번개를 초대해 한바탕 질펀하게 오전까지 노닐다 떠났다. 온통 빗물로 어지럽혀 놓은 듯 보이나 햇살로 씻어내니 세상은 온통 맑은 얼굴이 되었다. 비가 내리는 것은 비 자체의 모습보다는 빗소리를 통해 먼저 알아차리는 편이다. 문득 들리는 빗소리는 갑자기 날아온 친구의 편지처럼 반갑다. 비가 내리는 날씨는 두 손을 번거롭고 부족하게 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나 우산을 들고 걸어가거나 창문 사이로 들리는 빗소리만큼은 유독 좋아한다.


빗소리, 비의 소리! 아이러니하게도 비는 소리가 없다. 우리가 듣는 빗소리는 비가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들. 파도소리는 물결이 저들끼리 스스로 부딪히며 일정하게 소리 내지만 빗소리는 공기 중에 만들어진 물방울이 중력에 의해 땅에 떨어져 물체에 닿는 순간 비로소 제각각의 서로 다른 비명을 지른다. 빗소리는 비의 마지막 소리다. 양철 지붕에 떨어지며 내는 빗소리, 아스팔트에 떨어지며 내는 빗소리, 비닐우산에 떨어지며 내는 빗소리는 모두 다르다. 빗소리는 세상의 사물만큼 다양하다. 떨어지면서는 알 수 없는 비의 소리들, 가 닿을 대상에 따라 유일한 목소리를 내는 비의 소리는 마치 우리네 삶과 닮아 있다.


대상에 따라 나의 존재는 각기 다른 모양으로 소리를 낸다. 관계는 상대적인 탓에 좋은 사람을 만나야 나라는 악기는 제 음을 찾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가끔씩 길을 잃은 내 악기는 대상의 도움을 받아 조율되기도 한다. 빗소리는 내게 대상을 만나야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처럼 느껴진다. 열심히 낙하하는 비의 방울들이 딱 한번 소리 낼 대상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뇌와 시련을 견뎌냈을까. 들고 있던 우산을 내려놓고 내 몸이 만들어낼 빗소리를 듣기 위해 두 팔을 벌려 비를 안아본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비 내리는 풍경을 우아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 빗소리를 듣는 일이다. 안에서 들으면 낭만적인 과거로 나를 밀쳐내고 밖에서 들으면 치열한 현재와 감상적인 미래의 중간에 나를 세워놓는다. 빗소리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지만 시간의 문제로 경험케 한다. 비가 그치고 나면 다시 그리워하리라. 폭우의 웅장한 소리들을!

이전 11화 나의 초능력들 11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