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때리기 : 생각 없음에 대한 생각들
너무 많은 생각이 너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야말로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 가만히 서 있으면 1/3 확률의 가능성을 지켜낼 수 있음에도 골키퍼는 한쪽 방향으로 몸을 던진다. 이러한 행동 편향 Action Bias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불편함을 몸소 보여주는 좋은 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는 말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행동을 해야 할 때의 적극적인 태도를 무책임하게 부정하는 것이니 부추길 말은 아니다. 모든 순간들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이 생각을 하는 관성이 생긴다. 경제적인 우위, 사회적인 체면, 문화적인 품위 등 나를 나보다 더 나은 나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하며 판단한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그래서 피곤한 일이 된다. 내가 편하지 않으니 상대도 편하지 않다. 생각이 보이지 않게 충돌하고 있지도 않은 자리를 눈치들이 다툰다. 그래서 얻은 것은 묵직한 공허와 피로감.
가만히 앉아서 혹은 서서 멍하니 있는다. 방금 전까지 바쁘게 달려가던 생각은 사라지고 온 우주가 고요하다. 내가 멈추면 나의 세계는 멈춘다. 결국 세계는 내가 생각할 때에만 세계인 것이고 내가 존재할 때에만 세계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닌가. 200년 전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고 말한 쇼펜하우어의 말이 멍을 때리는 순간 현재의 진리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생각의 죽음이라고 판단해서 회피하는 것일까. 생각 없이 사는 인간으로 전락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 두려운 것일까. 가끔은 자발적인 생각이 아닌 생각들은 모두 잉여의 생각일 뿐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한 무가치한 생각들로 부지런해진 몸뚱이는 오히려 게으름일지도 모른다고 치부했다. 겉으로는 바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비효율적인 움직임.
멍 때리기를 하면서 너무 곁가지로 흘러가는 생각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생각의 하수로로 흘려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과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실천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무의지를 의지하려는 아이러니는 명상이거나 멍 때리기로 안내한다. 명상의 원리는 모르나 멍 때리기는 한 곳에 시선을 던지고 머무르는 것이다. 생각이 아닌 시선이다. 그 시선은 사물을 알아채려는 의도가 배제된 온전한 시선을 사물에 걸쳐놓는 것에 치중한다. 지금도 멍 때리며 글을 쓰기에 맥락과 논리를 충실하게 배반하고 있다. 멍 때리기는 정해진 길을 걷던 걸음을 차선이 없는 사막에 옮겨놓는 것이고 방향과 속도를 염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나의 초라한 능력은 멍하니 생각 없이 존재하는 일이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쓸모없음'이 된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유력한 '쓸모'의 가능성을 탑재하는 순간이 된다. 앞에서의 모든 게임들을 리셋하고 젖은 운동복을 갈아입고 다시 경기장에 나서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게 된다. 쓸수록 비상해지는 것이 '생각'일 수도 있지만 멈출수록 새로워지는 것이 '생각'일 수도 있다. 멍 때리기는 급한 생각의 브레이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