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숲오 eSOOPo
Jan 17. 2023
어쩌다, 시낭송 009
돌아서 주저앉고 싶은 날이 있어
I 아무것도 안 할 때가 난 격렬해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이 당길 때가 있다.
보기 흉측한 춤을 추고 싶을 때가 있다.
반갑지 않으면서 미소를 띠는 때가 있다.
잠들기 전에 에스프레소를 내릴 때가 있다.
산책하러 나오다 술집으로 갈 때가 있다.
오늘이 어쩌면,
모임을 잘하고 카톡방을 나올 때가 있다.
양파 사러 갔다가 수박을 안고 올 때가 있다.
농담을 하다가 눈물을 펑펑 흘릴 때가 있다.
동그랗게 앉아서 뾰족한 인상을 쓸 때가 있다.
끝을 내러 갔다가 다른 시작을 할 때가 있다.
그게 뭐가 이상한가!
봄에 눈을 맞고 여름에 떨어지는 잎을 볼 때가 있다
마스크를 한 채 상대의 표정을 읽을 때가 있다.
당신이 말할 때 당신의 손만 바라본 때가 있다.
혀보다 손이 더 정직하게 말을 건넬 때가 있다.
멈춰있는 트럭이 과속으로 나를 덮치는 때가 있다.
지금 그렇다... 내 앞의 수많은 돌멩이들이...
II 내게는 눈부신 달을 볼 문글라쓰가 필요해
공짜영화를 보겠다고 이십 리 길을 걸어 극장에 가본 적 있니?
가는 건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
생각의 생각의 생각의 꼬리를 물다 보면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도 잊게 되지.
그런 이상한 걷기의 망각을 거듭하다 보면 생각보다 멀리 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돼.
그걸 '망각의 축지법'이라고 나는 부를래.
옛날 사람들도 문경새재를 넘으며 그랬을 거야.
내가 이 고개를 왜 넘어야 하나.
넘어서 한양 간들 과거에 붙을 수는 있나.
떨어지면 돌아올 때 무슨 낯으로 고개를 넘나.
뭐 그러다 보면 목적지는 코 앞에 스스로 와 있지.
오늘도 많은 생각들을 내 걸음수보다 많이 했어.
풀린 것도 있고 더 꼬인 것들도 있어.
그러면 어때?
꼬인 건 꽈배기처럼 모아두었다 기름에 튀길 거야.
풀린다고 다 좋지는 않더라.
곧 퍼져서 탄력이 떨어져 쓸 데가 없어지더라고.
암튼 오늘은 흐린 구름사이로 뜬 낮달이 눈부셔서
허리에 차고 나온 문글라쓰를 멋들어지게 써 볼 거야!
자! 어때?
내가 그렇게 부끄러워?
III 나무가 그립지도 않으면서 나무를 노래했다
그리운 나무_정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