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이숲오 eSOOPo
Mar 06. 2023
어쩌다, 시낭송 057
경칩을 '시작하는 연인들의 날'로 정하자
I 은행나무 씨앗 품귀현상 예고
경칩이라고 하면 개구리타령만 하지만
사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놀라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들은 벌레들이다.
외부의 자극도 있겠지만 놀라게 하는 원인은 봄이라는 자연의 섭리다.
웅크리고 있는 만상의 생물들을 기지개 켜게 한다.
절기는 그 타이밍을 포착해서 우리에게 지혜를 족보처럼 귀하게 물려준다.
세상이 이상기온을 보이고 기후변이를 수시로 변덕 부려도
올해의 경칩은 정확하게 봄의 대문 역할을 한다.
두꺼운 옷들을 벗어던지고 얇고 화사한 봄의 옷으로 갈아입힌다.
옷만 갈아입었는데 가슴이 살랑거린다.
그 마음의 모양은 마치 사랑을 시작하는 이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추운 날 초콜릿 주고받으며 챙기는 남의 나라 이벤트보다
우리 풍토에 맞는 이야기를 가진 오늘을 '연인의 날'로 기념하는 건 어떨까.
조상들은 경칩이 되면 사랑하는 이와 만나
서로에게 은행나무 씨앗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암수 서로 마주 보고 정다워야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를
연인의 모습에 투영하고 실제로 이벤트에 적용하는 지혜를 실천했다.
씨앗도 암수의 구분이 있었으니 끝이 뾰족하고 세모난 수컷 종자는 남자가 여자에게
끝이 둥그런 암컷 종자는 여자가 남자에게 수줍게 건네지 않았을까.
어디에나 쉽게 접하는 편의점에서 구입한 초콜릿을 건네는 편리함보다 낭만적이다.
게다가 한 달 간격을 주고받는 불안함보다 동시에 주고받는 신속함이 더 힙해 보인다.
씨앗을 구하기 위해 남녀청춘들은 얼마나 많은 자연의 품에서 설레며 어슬렁거렸을까.
주고받은 후에는 은행나무 숫그루와 암그루 주위를 돌면서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은행나무는 영어로 Ginkgo다. 소리 내어 보라!
서로에게 사랑스럽게 찡긋거리는 연인의 눈인사처럼 경쾌하고 흐뭇하게 들리지 않는가.
II 옐로이 옐로이 레마 사박타니?
서울 모처의 성당 성가대 단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성음악과 함께 콜래보레이션으로 진행할 예정인데 복음사가의 낭독 부분을 해달라는 제안이다.
천주교에서는 부활절 이틀 전에 성금요일을 기리며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이때에는 요한을 비롯한 복음사가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입체적으로 읽어나가게 되는데 대체로 해설자와 사제, 필요하다면 신자들과 함께 참여한다.
그러나 이번 행사는 처음으로 성음악을 사이사이에 배치해서 더욱 성스럽고 드라마틱하게 구상했다는 것이다.
국내 최초일 뿐 아니라 세계 최초로 시도하는 것이라고 덧붙이기에 정말 대단하시다고 반응했다.
어떻게 아시고 연락을 주셨냐고 하니 지난 성탄음악회에서 듣고 보았던 감흥을 언급했다.
나는 지난 크리스마스이브 가까운 어느 저녁 명동성당 대성당에 있었다.
바로크 성음악 작곡가 하인리히 쉬츠의 '성탄이야기'의 연주회에 복음사가 역할을 맡았다.
그때의 낭독은 이제껏 들어본 어떠한 낭독들보다 인상적이었으며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제안에 대한 고민과 판단도 하기 전에 감사하다고 말해버렸다.
그것을 승낙으로 알아 들었는지 곧바로 '함께 하게 되어 기쁘고 고맙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래 묵은 냉담자는 뜻하지 않게 성전에 또다시 서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자랑도 뭐도 아닌 이야기다.
III 속은 한 번 상하면 돌이킬 수 없기에 아껴야 해요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_이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