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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Mar 22. 2023

어쩌다, 시낭송 073

표현하지 못하는 순간을 더 많이 사는 것 같아

I    글을 쓸 때엔 펜보다 가슴이 필요해


전체를 지탱케 하는 것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의 무턱 댄 지원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는 이들은 하찮으나 가치마저 벗어던져버린 것은 아니다.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일 뿐 없어서는 안 된다.

건물의 주춧돌, 벽에 가려진 철구조물, 창을 창이게 하는 창틀, 문을 문이게 하는 문틀.

보이는 것들은 그럴듯한 이름들을 가지고 주요 요소 곁에서 묵묵히 존재를 드러낸다.

그러나 일상이라는 삶의 축에서는 무어라 지칭할 수도 없는 여백의 구조물들이 있다.

그것을 비켜 한 발자국도 함부로 쉽게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데 곰곰이 음미할수록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그것이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명명할 수 없으니 그것은 표현할 수도 없고 말하여지지 않으니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말하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유독 감정과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않는 경우에는 더 말할 이유를 가지지 못해 그저 휘발되어 버린다.

그 순간을 포착하면 그 결이 독특하고 미세하다.

감정의 변곡점이 되기도 하는데 이것을 잘 감지하는 것은 예술의 감각이라고 별명 지어도 좋다.

이처럼 예술은 감정을 개진할 때에 그 너머의 감각이다.

예술은 조심스럽게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으로도 쓸 수 있는데 예컨대 이런 경우다.

사자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지만 예술적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사자의 아가리에서 머리를 보존하는 것은 예술의 영역이다.

사자의 욕망마저 돌려놓을 수 있는 외적 작용을 예술은 마련할 수 있다.

글을 날마다 쓰는 것은 근면이지 그 자체만으로는 가치동력이 미약할 수 있다.

외부의 방해 요인이 시시각각 위협할 때마다 꺾이는 것은 예술적 행위로 글쓰기를 승화시키지 못한 탓이다.

예술은 직접접인 기능으로 작용하지 않기에 도구로 무용하다는 오해를 받는다.

타자의 사랑이 나의 행동을 의지와 무관하게 전환시키는 것은 사랑이 예술과 비슷한 기능을 발휘한 것과 유사하다. 

글쓰기를 지속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글쓰기 방법론 자체에 있지 않음은 분명해 보인다.

어부가 배를 저 바다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노에 있지 않고 그의 가족을 위해 고기잡이할 그 사랑과 책임과 의지에 있는 것처럼.

 



II    평행선이 중앙에 있으면 지루하다


아주 노련한 영화감독이 유작 같은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

예전보다 생기발랄하지 않았으나 진득하게 관객에게 말을 건네는 요령은 녹슬지 않았다.

다소 잔잔하게 2시간을 넘기고 마지막 3분을 남긴 시점에 뒤통수를 강하게 친다.

캔버스에 평행선을 아래쪽으로 그리면 흥미롭다네 
캔버스에 평행선을 맨 위쪽으로 그려도 흥미롭다네 
그런데 평행선을 중앙에 그리면 따분하고 지루해져




III    나는 무언가 알게 된 사람처럼 유리문을 연다


https://youtube.com/watch?v=agNIYF1wVzQ&feature=shares

문턱에서_안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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