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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pr 13. 2023

어쩌다, 시낭송 095

제대로 머무르고 싶어서 멀리 떠날 거야

I    머물기와 떠나기는 상보적 관계    


냉큼 떠나지도 못하면서 온전하게 머물기를 바라는 건 옳지 않아.

떠나야 하는 것은 이곳의 환멸 때문이 아니지.

잘 머물기 위해서 떠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돼.

어차피 떠나는 것은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해야 성립하니까.

머무르는 순간을 품지 않은 떠남은 방황이나 배회일 뿐이야.

잘 머무른 자만이 제때에 떠날 수 있어.

때에 맞춰 떠날 줄 아는 이들은 언제 어떻게 어디에 머무르지도 아는 지혜를 가지는 것 같아.

떠나고 머무른 것은 서로 깊은 영향을 미치지.

떠나는 것이 쉽지 않거나 어긋난다면 나의 머묾을 살피면 될 거야.

머무른 사이사이에 여백이 없거나 바늘하나도 들어갈 빈틈이 없어도 떠날 엄두를 못 내지.

혹 머물러 있는 시간들이 공허하다면 긴 시간 떠나지 않은 나의 소홀함에서 힌트를 얻어야 하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떠난 어딘가에서 짐을 풀어놓고 일상의 루틴을 하나씩 하는 나를 발견한 적이 있지.

새삼 머무르는 시간의 행위들이 새롭게 다가오더라고.

온전히 떠나기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닐 거야.

다시 돌아갈 일상의 행위들에게 바람을 쐬어주고 새로운 마음의 환기를 시켜주고 싶어서일지도 몰라.

우리 동네에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캠핑 식당이 호황을 누린 적이 있어.

너무 신기하고 우습기도 했어. (그래도 도시인들은 언제라도 떠나고 싶은가 봐.)

무슨 도심 한가운데서 캠핑 텐트를 친 실내 공간에서 숯불에 고기를 굽고 캠핑 기분을 낸다니.

환기를 위해 열어둔 거리에는 노루 대신에 시내버스가 도로를 달리고 파도 대신에 배달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는 이곳에서 말이야.

그곳을 이용하는 이들의 표정이 궁금해서 잠깐 가게문을 열고 들어가 보기도 했어.

그들은 떠나지 않고 떠난 곳에서의 행위를 하고 있어서인지 얼굴은 차분하고 일상적이어서 조금 실망스러웠지.

떠나는 것은 머무른 곳과의 사이를 가져야 유효한 거니까 머무른 척이 불가능하듯 떠난 척도 어려운 일일 거야.

이렇게라도 깊이 일상에 머물고 나서는 가장 멀리 떠나고 싶어지나 봐.

떠나고 나서는 그곳에서 가장 심오한 머묾을 꿈꾸듯이 말이야.  




II    걷다 보면 신체보다 생각의 다이어트가 된다


어제는 혼자 하루종일 거리를 걸었다.

걷다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잠시 앉았다가 또 걸었다.

걷는 것은 샤워할 때와 비슷한 효과를 준다.

그중 하나가 아이디어가 숲길의 피톤치드처럼 내 머리 위로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

꼬인 생각들도 걷다 보면 스르르 풀리는 경우도 있다.

막막한 계획들도 걷다 보면 실마리가 읽히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면 꼭 생각을 머리가 아닌 다리가 하는 것 같다.

걷는 속도가 느려 보여도 검색보다 나에게 최적화된 결과물들을 나만 특별히 건네받을 수 있다. 






III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 밖에 될 수 없을 때


https://youtu.be/UKnMfazXM38

사철나무 그늘아래 쉴 때는_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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