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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이를 살리고 쓰는 자신을 살리는 글이다.
기분을 살리고 지각을 살리고 감성을 살리는 글이다.
살림의 핵심은 계속 이어 가게 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브런치스토리는 지속을 부추기고 끊임없음을 독려한다.
여기에서 '살리다'의 반대편에는 '죽이다'가 아닌 '방치하다'이다.
사라짐이 아닌 '있는 그대로' 두는 것에 있다.
좋은 글은 글과 연결된 인간을 살린다.
좋은 글은 방치된 언어를 살리는 글이다.
익숙한 언어습관으로부터 탈주해 낯선 그곳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글이다.
이전의 뜻 너머의 숨은 의미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즐기는 글이다.
언어를 구출할 때마다 한 뼘씩 언어는 문장 위에서 자란다.
해묵은 언어의 본디 의미에 기대어 글을 쓸 때마다 언어는 몸살을 앓는다.
언어는 말을 할 때보다 글을 쓸 때에 언어의 체질이 더 성숙된다.
그래서 말보다 글에서 실제 글쓴이와의 간극이 더 커 실망하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좋은 글은 글과 연결된 언어를 살린다.
나의 글은 살리는 글인가
누구를 구하기 위해 쓰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구조의 행위와 유사하다.
말로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듯이 글로도 가능하다.
말의 휘발성보다 글의 흔적들은 그 위력이 강력하다.
수정 가능하다는 것이 글에 대한 책임을 더 크게 지운다.
나의 글은 '누구를 구하기 위해 쓰는가'를 수시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어제의 실패한 삶으로부터 안전하게 오늘로 건져 올린 글들을 찾아본다.
아침마다 안녕하냐고 내게 인사하는 새들에게 먹이로 던져줄 유용한 글을 써야 한다.
한 줌의 태양으로부터 그늘이 되어주는 나무를 껴안아줄 믿음직한 글을 써야 한다.
내가 글을 쓰기 전과 쓰고 나서의 세상은 달라져야 한다.
너무 거창한가.
글을 쓰는 게 그렇게 거창한 일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내 안에서 화산폭발과 대지진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엄청난 내적 재해와 위험도 감수하지 않고 글을 쓰려고 한단 말인가.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도 말하지 않았던가.
글을 쓰는 것은 죽은 사람과 협상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