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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n 23. 2023

괜찮은 불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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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이 늘 나쁜 것은 아닌 듯하다.

가령 등산객이 산을 오를 때 걸어 오르는 불편 때문에 케이블카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애써 불편을 감수하면서 갈 때에는 더 이상 불편이 아니다.

불편과 바꾼 것이 편리함보다 우월하기에 가능하다.

편리하지 않다는 것은 과정을 중시한다는 점도 있지만 불편이 주는 그 자체의 의미가 크다.

이제는 상당 부분을 보이지 않는 고지서로 전환했지만 한때는 종이 고지서를 고수했다.

카드로 결제가 되지 않던 시절, 직접 마감일자에 맞춰 은행에서 가서 납부하는 불편을 즐겼다.

자동이체의 편리함이 오히려 나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졌다.

몸이 편하다고 마음까지 편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유동적인 지출의 변이를 파악하고 방만한 생활습관을 매번 고쳐 잡을 수 있었다.

대체로 아날로그의 방식들은 디지털 첨단시대에 불편의 상징처럼 보인다.


'겪다'는 직접 경험하여 주어진 상황을 관통하는 것이다.

주로 편리하다는 것들의 특징은 '겪음'을 삭제한다.

자판을 두드려 글을 쓰는 것은 

연필을 깎는 경험과 

연필을 손에 곱게 쥐는 감각과 

흑연이 종이에 닿을 때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종이에 한 글자씩 집중해서 쓰는 정성을 일체 지워버린다.

디지털 글쓰기에는 문체는 있으나 필체가 없다.


지난 나흘동안 종이에 한 글자씩 만년필로 2740자를 썼다.

예상보다 쓸쓰록 속도가 붙지 않았다.

글자를 쓰다가 말을 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 어김없이 글자는 균형을 놓친 마음 상태를 드러냈다.

글자를 쓰는 일은 육체가 아닌 마음의 일이었다.

어느 글자도 똑같은 모양으로 두 번 쓸 수 없었다.

아날로그는 똑같은 두 개가 존재할 수 없다.

글씨를 쓰는 일만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행위에는 편리함으로 옮겨갈수록 불리해지는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넘어가지 않도록 붙들어 매는 일이 중요했다.

인간은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몸은 디지털에 맞지 않게 설계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편리함을 좇을수록 인간은 퇴화된다.

현대인들의 우울증을 몸을 쓰지 않은 것에서 원인을 찾는 인문학자가 있는데 쉽게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수긍이 간다.

반조리식품보다 모든 조리과정을 몸소 겪어낸 요리는 음식을 넘어 약이기도 하다.

시간이 걸림돌이다.

시간이 돈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니 불편은 돈을 낭비하는 것처럼 죄악시하고 등한시한다.

불편은 비효율로 이해되고 시대를 거스르는 일이 되고 발전부적응자로 비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편리한 방식으로 일을 할 때의 시간은 직선으로 일정하게 흘러가지만

불편한 방식으로 일을 수행하는 동안의 시간은 순간에서 영원까지 탄력적으로 흐른다.

상식적으로 시간을 멈추게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날로그로 접근하면 영화의 장면처럼 느리게도 흐르다가 빠르게도 흐른다.

그대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운명적인 사람을 만났을 때의 슬로 모션 같은 느낌과 주변이 사라지는 현상을 말이다.

그때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고 시간도 멈추고 나도 사라지는 초현실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아날로그적인 불편의 행위들은 이와 유사하게 시간을 다룬다.

아날로그는 디지털로 환산이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만리장성과 피라미드가 가능했을까.

여전히 나는 생사가 오가는 문제가 아니라면 불편을 즐긴다.

불편을 겪을수록 썩 괜찮은 불편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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