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숲오 eSOOPo Jun 28. 2023

길어 올리기

0381

긷다

종종 어떤 단어가 눈에 밟히다가 머리에서 맴돈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를 어서 구해달라는 신호다.

자세히 보면 이 동사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다.

푸다와 담다의 두 행위를 한꺼번에 아우른다.

푼 후에 곧바로 어딘가엔 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뜨다'가 있는데 이는 푼 후에 어디에 넣는 것을 이른다.

차이는 움직임의 라인에 있다.

긷는 것을 수학적인 라인으로 빗대자면 코사인 cosine곡선의 연속라인이고 뜨는 것은 그 곡선의 끝에서 머물거나 직선으로 변형된다는 점이다.

긷는 것은 리드미컬하다.

단순노동은 리듬을 가지기에 노동요를 탄생시킨다.

없던 노래도 단순한 움직임을 반복하면 육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작곡이 되어 입안에 맴돈다.


긷는 것은 우물과 같이 고인 상태에 있는 어떤 것을 푸는 것에서 시작된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물을 담을 때 긷는다라고 하지 않는다.

물을 퍼내기 전에 이미 조금씩 물은 시나브로 고이고 있어야 한다.


글쓰기 또한 긷는 행위와 비슷하다.

내면의 무언가를 퍼내어 글로써 담아낸다.

글쓰기는 그저 글자를 쓰는 게 아니다.

이전에 퍼내는 행위가 전제되어야 글쓰기는 진행된다.

무엇을 퍼낼 것인가
어떤 그릇으로 퍼낼 것인가
왜 지금 퍼내야 하는가
얼마큼 퍼낼 것인가
퍼낼 때 어떤 근육을 사용할 것인가

등등 담기보다 퍼내는 행위가 더 복잡하고 중요하다.

진정 사려 깊어야 하는 단계는 쓸 때보다 쓰기 바로 직전의 상태가 아닐까.

조금씩 내 안에서 샘처럼 솟아 나와 고이는 것들의 순도와 신선도를 매 순간 살펴야 한다.

혹여나 오염될까 우물 주위를 수시로 맴돌아야 한다.

우물은 생명과도 같고 생물과도 같다.

돌보지 않으면 어느새 더러워지고

퍼내지 않으면 금세 메말라 버린다.

그래서 말과 달리 글은 매일 쓰지 않으면 쓸 글이 말라 버린다.


요즘 들어 글 쓰는 것 자체에만 매몰되어 글쓰기 이전의 상태에 소홀한 나 자신을 보게 된다.

이제는 어서 돌보라고 내 안에서 '긷다'라는 화두가 조금씩 고이고 있었나 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름의 행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