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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n 29. 2023

불안한 안전

0382

(*이 글은 신변이 아닌 사고思考에 관한 이야기다)


누구나 안전을 꿈꾼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몸의 주변뿐만 아니라 마음의 피부까지도 불안을 경계한다.

그러한 본능은 안전에서 안정으로 영토를 넓히고 뿌리내리고 정착하고 싶어 한다.

안전에 대한 집착은 주의 소홀로 일어난 사고에다가도 붙여 부른다.

안전사고는 안전의 부족으로 일어난 사고인데 안전한 사고로 오해된다.

괴상한 언어구조의 염려보다 안전이라는 경각심을 달아주고픈 의도가 강해서다.

안전하게 하게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서로 만나면 인사하는 것이 예의다.

안녕하세요?

안전은 안녕이니까.

안전은 어느 시대에도 집단에게 체계화된 관념이고 신념이었다.

그야말로 안전은 이데올로기다.

그것을 육체에만 국한시킨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목숨이 하나뿐인 인간에게 안전을 소홀하게 여기게 한다는 것은 인류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러나, 몸이 아닌 사고로 옮겨와 적용한다면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일상적인 생각의 차원에서 나아간 어떤 계획, 꿈, 상상의 영역에서의 안전이란 정말 안전할까.


안전한 꿈
안전한 희망
안전한 상상력
안전한 유토피아
안전한 러브스토리


'안전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이자마자 어색해지는 단어들은 무수하다.

안전해지려 하자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이상적이고 유니크한 것들은 대부분 불안을 먹고 산다.

불안을 죄악시하기에 피하고 싶어 하고 부정의 관념으로 터부시 한다.

불안을 질적인 측면에서 가치판단할 필요가 있다.

사고의 안전 안에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 더 불안하다.

불안을 가지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이 안전의 그것보다 월등하고 매혹적이다.

불안의 상태가 불가능이나 무기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의미한 긴장을 가지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아지려는 활성화된 가능성을 의미한다.


불안은 안주安住를 죽도록 불안해한다.

불안을 그대로만 둔다면 의미없지만 불안의 생리를 잘 이용한다면 생산적이다.

불안을 자주 초조와 짝을 지어 부르는데 불안이 싫어한다.

불안은 조급해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불안이 있기에 글을 쓰지만 조급해서 글을 쓰지는 않는다.

불안을 잘 다루는 자를 염세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어리석다.


불안 전문가 페르난도 페소아 형님은 불안에 관한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자신의 책 <불안의 서>에서 이렇게 불안을 노래한 바 있다.



더 높은 경지에 있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행위는,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이다.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할 훈련에 자신을 내던지고,
이미 무의미함을 알고 있는 철학과
형이상학적 규범을 혹독하게 준수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안전해 보이는가!

안전해 듯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불안한 일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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