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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Nov 08. 2023

책의 쓰임새

0514

얼마 전 한참 후배에게서 오랜만에 안부전화를 받았다.

그간의 여러 화려한 행보를 전하며 여행자금조달을 위해 급히 동네 슈퍼에서 파트타이머를 시작했다고 한다.

일이 힘들 줄 알았는데 사람응대가 만만치 않다고 했다.

특히 교양 없이 말을 함부로 명령조로 하거나 욕을 하는 경우도 있어 너무 스트레스가 많단다.


왜 제게 이러는 걸까요?


니가 동안이라서 그렇지!라고 어쭙잖은 위로를 했지만 후배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기엔 힘이 부쳤다.

나의 엠비티아이 특성상 대안과 문제해결에 도움을 직접적으로 던져주고 싶어서 잠시 고민했다.


내일 출근해서는 손님 눈에 잘 띄는 곳에 책을 엎어놔 봐!


후배는 일 자체만으로도 피곤한데 무슨 독서냐고 반문했다.

안 읽어도 돼!

그냥 책 제목이 보이게 시옷 모양으로 눕혀두기만 해. 될 수 있으면 철학책이나 두껍고 딱딱한 제목이면 더 좋고.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볼게요, 선배!


오늘!

밝은 목소리로 후배가 전화기너머로 수다를 쏟아낸다.


선배! 대박이에요!


월급날이니?

아뇨! 선배 말대로 한 후로는 한 번도 저를 막대한 손님이 없었어요.

아! 그랬니? 참 잘된 일이구나.

후배는 같은 이야기를 일곱 번 정도 하더니 통화를 거두었다.


전화를 끊고 후배의 스트레스가 간단히 사라졌다는 소식에 나 또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알 것 같다.

다소 한산한 시간대에 일하는 후배가 엎어둔 책을 몇 번을 집어 무료한 시간을 해소하려 간간히 읽었을 것이다. 

책 읽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모습을 우연히 바라보며 들어온 손님들은 차마 그 거룩한 풍경을 감히 침해하지 못했으리라.

책을 쥔 후배의 손은 더욱 친절했을 것이며 독서 후 뱉은 응대의 어투들은 격조 있었을 것이다.

단지 책 겉표지를 보고 우악스러운 손님들이 변화했을 거라고 단순하게 믿는 후배에게는 이 비밀을 우리끼리만 간직하기로 하자.


https://brunch.co.kr/@voice4u/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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