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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Nov 09. 2023

신선한 망각

0515

기억 때문에 심드렁하다.

낯섦도 기억의 나열 사이에 있어야 온전히 낯설다.

사라짐은 늘 느긋하고 질척거린다.

잊으려 애쓰면 더 오래 남는다.

다짐도 기억의 계열인지라 지울수록 얼룩은 진해진다.

산다는 건 기억을 부단히 들추는 일이고 망각으로부터 강제로 격리되는 것이다.

잘 사는 이는 망각을 수시로 자유이용권으로  누리는 자다.

불행한 이는 기억의 사슬로 스스로 칭칭 동여맨 자다.

가끔씩 활자보다 이미지가 서둘러 떠오른 채 단어가 기억나지 않는 순간이 즐겁다.

무수한 낱말들을 붙들어 두며 신경을 억압하는 기억력의 직무유기를 반긴다.

널 영원히 기억할게

이건 사랑하는 사이에서 금지어다.

진정 사랑한다면 고쳐 말해야 한다.

널 꾸준히 망각할 거야

사랑은 생동의 의지이지 기억의 상태는 아니다.

기억만으로는 사랑은 심드렁해진다.

차라리 잊음으로써 신선해지는 편이 낫다.

기억은 성질이 고약해서 불순물이 첨가된다.

카페에서 그와 키스하며 떨어뜨린 것이 포크인지 스푼인지 기억은 무책임하게 기록한다.

사랑할 때에는 기억을 꺼내 이야기 나누는 기회를 가져서는 안 된다.

오직 생동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서로 생성되는 것들에 대해서만

여기 피어나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미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만

잊혀질 듯 아련하게 지워질 듯 절박하게 -


https://brunch.co.kr/@voice4u/122

가만히 떠올려 본다.

우리의 그 많았던 사랑들은 기억의 조각들보다 망각의 여백들이 그때마다 가능케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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