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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Dec 04. 2023

곰국 안갯속

0540

힘들어도 힘이 되는 말이 있다.


견딜 수 있게 하고 버틸 수 있게 하는 건 근력보다 따뜻한 말 한마디다.


여기까지가 그 흔한 인지상정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몇 자 떠올린 말이 고작 뻔한 문장으로 적혀있다.


탄력을 잃은 공으로 하루를 놀자니 기운이 빠지고 힘이 더 들 판이다.


다그치는 전화목소리가 징징 남아 있다.


한발 물러서니 그새를 공격의 기회로 삼는 건 비겁해 보인다.


품위는 자기 자신을 괴롭혀야 조금 반짝일 수 있다.


방안의 불을 켜야 하는 오후의 하늘이 아늑하다.


편지보다 일기를 자꾸 쓰게 된다.


음악이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모래알 같을 때가 있다.


귀 안쪽이 약 올라 있다.


귀의 굴곡이 신기하다.


인체 중에서 가장 복잡한 조각이 양쪽에 달려 있다.


세상 소리의 단순하지 않음을 귀도 알아차린 걸까.


귀를 만지작 거리다가 코로 손이 간다.


비로소 감정이 들통난다.


미끄러져버린 마음일 때 손은 코를 찾는다.


지도교수로부터 긴 문자가 도착했다.


친절한 말투인데 거듭 읽으니 몸이 바빠진다.


모처럼 물을 준 책상 위 화분 두 개가 고맙다고 자기 몸에서 시든 잎 두 개씩을 책상 위로 툭 던진다.


기브 앤 테이크는 생물 사이에 흔히 일어나는 불공정거래다.


아래층에서 밤새 곰국을 끓이다가 사골까지 태워버렸는지 새벽 아파트는 소동이 일어났다.


새벽 2시에 우리 동 전체가 오랜만에 민방위훈련을 파자마 바람으로 일사불란하게 치렀다.


정작 초로의 부부는 태평한 표정으로 소방관 3명을 맞이했다.


새벽 외간 남자들에게 수고한다고 뜨끈한 곰국도 한 그릇 대접하지 못하고 보낸 게 못내 아쉬웠는지 볼맨소리로 천장의 오래된 벽지 때문에 화재경보기가 고장 났다고 등에 대고 연신 말했다.


결과와 원인을 연결 못하는 건 어린 시절 아이템플을 안 풀고 미뤄둔 탓일 게다.


다음날 오후까지 일기예보에도 없는 곰국안개 가득했다.


곰국이 알람기능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옆집에 젊은 부부가 사는 것도 곰국 덕분이다.


https://brunch.co.kr/@voice4u/128


곰국 안갯속에서 얼핏 곰 한 마리가 마늘을 씹으며 복도를 지나가는 걸 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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