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결산으로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정리하는 분들도 많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 못하고 내 머리로 이해를 다할 때까지 뜯어먹기 때문에 올해 결산할 책을 양으로 따지면 참으로 누추하다. 나는 느리게 읽는다.
대신 나는 올해 한라산을 혼자 걷고 또 걸었던 시간을 결산하기로 한다.
한라산을 다녀오면 탐방로 길이와 난이도에 따라 걸음수가 다양하지만 꽤 마음 단단히 먹고 도전해야 하는 길은 보통 3만 보가 훌쩍 넘는다. 백록담에 다녀오면 4만보 이상이다.
12월 2일, 어제는 2023년 한라산 당일 쏠로 여섯 번째였다. 영실-남벽-어리목 탐방로를 다녀왔다. 전날 대설주의보로 탐방 금지가 되었다가 풀려 가장 신선한 상고대를 지나다녔다. 꿈같았다. 사진은 다 담지 못한다. 나의 눈과 가슴에 한껏 담아왔다.
새벽 2시 20분에 일어나 여유 작작 필사 후 업로드를 하고 3시 30분에 김포행 운전을 하며 어두운 하늘을 담으며 감사했다. 제가 또 갑니다. 쉬고 싶어요.
시간을 잡지 못하는 구간이 있다. 반포 IC에 거의 다다르면 오른쪽 김포공항행 올림픽대로로 빠지는 길의 가장 커브가 심한 곳이다. 한강이 빛으로 내게 오는 곳. 지난번 산행 동행에게 그 한강, 그 시간을 사진에 담아달라 했었지만 담지 못했다.
그곳은 한라산으로 가는 날에만 내게 오는 황홀하고 몽환적인 새벽빛의 시간이다.
어둠을 뚫고 제주에 도착해 영실 탐방로에 안전히 들어섰다. 윗세오름 표지석 남벽 방향의 돌, '해발' 아래쪽의 숫자를 처음엔 읽지 못했다. 눈이 잠깐 삐~. 1700 미터면 윗세오름이다.
남벽 가는 길은 지루하지 않다. 경사와 굽이치는 작은 길들, 떨어지면 못 올라올 것 같은 깊은 계곡까지 흥미진진하다. 이번에는 안개에 잔뜩 가려져 남벽을 보진 못했다. 전날 대설의 혜택을 가슴에 담아 온다.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눈이 만든 광경에 나를 데려가라 주문을 건다. 가장 행복하게. 이곳에서.
얼어붙은 산이 나의 최종 목적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는 얼어붙은 산보다 우주에서의 마지막이 더 좋지 않겠냐며 그게 가능한 날까지 잘 살아보라 한다. 그래 그것도 좋다. 꽁꽁 언 시신을 가루로 만들어 처리하는 곳, 그래 그것도 좋아. 나는 그래도 겨울 한라산에 매번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