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때는 불투명 순수한 하얀색의 꽃잎이지만 비를 맞으면 투명해진다. 이름도 여러 가지다. Diphyleia grayi(다이필레이아 그레이), 산하엽(山荷葉), Skeleton flower (해골꽃), 유리꽃이다.
한국어 꽃말인 '친애의 정', '행복', '청초한 사람'보다 영어 꽃말의 의미가 나는 더 좋다.
Beauty (아름다움), peace (평화), transformation (변환), hope (희망), new beginnings (새로운 시작), the ability to ease pain (고통을 완화하는 능력), 그리고 relaxation (쉼, 여유, 이완)이다.
나는 투명의 의미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산다.
첫 번째는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말하는 투명이다. 낯섦이 없는 사적인 영역도 모두 까발린 포르노그래피 같은 폭력적 투명이다. 우리가 사는 디지털 사회의 일면이다. 은밀한 매력보다 까발린 천박함에 뒹굴며 산다.
두 번째는 하늘 같은 투명이다. 공기 같은 투명이다. 어디에나 있지만 보이지 않지만 항상 존재하는 투명, 이런 투명한 사람들이 있다. 누구나 사랑하며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이다. 외로운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된다.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수만큼,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수만큼 꾸준히 상처받게 된다. 슬픈 사랑은 피하도록 한다.
세 번째는 이 diphyleia 꽃 같은 투명이다. 단 하나와 닿을 때만 투명이 된다. 비는 다이필레이아의 연인이다. 비 또한 온 세상에 온다. 그러나 지나간다. 다시 시간을 간직한 불투명한 이야기를 간직한다. 그리고 기다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