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시낭송이 필요하다 64회

두 번째 프로젝트

by 이숲오 eSO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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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만나러 가기 전에 노인은 서둘러 서문을 작성하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으로 걸어가는 시점에 두 번째 프로젝트는 시낭송에 대한 깊은 사유를 기술서가 아닌 인문학적 어조로 책을 내는 것이다. 가제도 정했는데 <생활예술로서의 시낭송>이다. 이마저도 출판사 측의 개입으로 수정된 안이다. 처음 노인이 제시한 것은 <시낭송의 근원과 본질>이었으나 이는 상업적으로 셀링 포인트가 취약하다는 의견에 부딪혀 무산됐다. 사실 기존의 시낭송 관련 서적에 적잖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노인이다. 그가 제목에까지 고집스럽게 붙이고자 했던 근원 개념은 물리적 시간으로서의 시작점이 아니라 시낭송이 일어나는 순간의 인과적 사유나 관계의 사건을 이르는 말이다. 과거의 어느 순간이 아닌 현재의 발화순간이 더 중요한 지점이라고 세상에 활자로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시낭송의 본질도 두루뭉술하게 다룰 것이 아니라 시낭송가, 시, 목소리, 낭송 행위를 독립적으로 다루고 네 가지 측면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다룰 작정이다. 초기 구상한 영역이 가면 갈수록 깊어지고 넓어져 출판사에서는 700쪽 분량은 족히 넘는 두꺼운 책이 나올 것으로 예측한다고 했다.


노인은 소년을 만나기 전 잠시 공원 산책을 하려던 발길을 돌려 영화관으로 향했다. 8개 상영관을 가지고 있는 멀티플렉스 극장이었는데 5 개관이 한 개의 마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수상했다는 두 편의 영화는 늦은 시간에 듬성듬성 자리하고 있었기에 당장 볼 수 있는 영화는 독점하고 있는 시간대를 벗어나 선택할 수 없었다. 잠시 박스오피스 앞을 서성이다 비치되어 있는 전단 포스터를 집어 들었다. 줄거리는 도통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었다. 무언가 커다란 사연을 품고 있는 세상의 판타지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고 표를 끊었다. 이미 세상도 매 순간 알 수 없는 판타지가 아닌가. 자리에 앉자 광고가 스크린에 쏟아지는 사이 옆자리에서 두 젊은 남자가 흥분된 어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얼핏 들려오는 단어는 '세계관'이었다. 현세계관을 초월하는 개념들을 이해해야 두 시간의 영화가 오락이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예쁘고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 영상을 감상하고 나오면 될 것이다. 노인은 우려와는 달리 영화를 젊은 시인들의 현대시를 감상하듯 즐기고 있었다. 개연성을 넘어서는 전개는 시의 행과 행을 이해할 때와 같은 즐거운 긴장이 있어 좋았다. 영화 줄거리보다 더 이해가 어려운 쿠키영상을 보면서는 노인 혼자 웃지 못했다. 각자의 느낌을 온전하게 위임하는 이 영화는 세계관을 모르고 감상하는 노인을 소외시키지 않고 오히려 다른 빛깔로 매료시켰다. 노인은 미로 같은 영화관 출구를 걸어 나오면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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