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좋은 날은 오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하다. 모든 날이 시작하기에 좋은 날이기 때문이다. '나중'이라는 때를 기다리느라 '지금'이라는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은 타이밍 포착 능력이 아닌 타이밍 획득 의지의 문제다. 날마다의 연습 일기를 쓰는 일이 그러했고 몸을 움직여 시 한 편이라도 소리 내어 그려보는 일이 그러했다. 소년은 날마다 매 순간이 시작의 문을 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작의 문에서 문고리만 찾으면 해결되는 것이었고 문고리는 늘 문 어딘가에 붙어 있기에 조금만 수고를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혹시 문고리가 없더라도 문은 세차게 밀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문을 여는 일의 상당 부분의 역할은 문이 아닌 소년에게 쥐어져 있었다. 온통 벽이었던 때가 있었다. 사방이 벽인 상태. 어디에도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 없는 상태. 방이 아닌 상자 안의 삶. 그때는 몰랐다. 한없이 자신 안으로 매몰되는 날들. 상자에서는 문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해체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상자는 늘 벽보다 두껍지 않고 견고하지 않다. 그 안에 있는 자신의 마음이 벽보다 완고하고 무기력해져 상자를 벽보다 단단하다고 여기기에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소년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보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려 했다. 그것은 결코 대단하거나 가치가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상자를 해체하는데 꼭 날카로운 도구가 필요한 건 아니다. 젓가락도 괜찮고 볼펜도 괜찮았다. 무엇이라도 집어 들기 편하면 아무것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년에게는 노랫말 낭독이 상자를 해체하는 도구였다. 시 한 줄 읽어내기 힘겨웠던 그 시절 노랫말은 위안이 되었다. 멜로디보다 노랫말이 소년에게 수시로 안부를 물어보고 질문을 던졌고 자꾸 괜찮다고 위로했다. 20세기 말 노랫말들은 그야말로 답답증 치료제였다. 보석을 좋아하지 않는 소년은 주옥같다는 표현을 싫어하지만 이 노랫말들을 읽을 때면 이 표현 외에는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소년이 녹음했던 노랫말들을 지금 들어보면 이별과 사랑의 아픔을 노래한 가사들이 대부분이지만 소리 내어 읽어낼 때의 효과는 놀라운 정도로 희망적이었다. 마치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는데 시원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듯 말이다.
'시작'이라는 글자를 소리 내어 말할 때면 '시'를 길게 끌다가 '작'에서 짧고 단호하게 마무리한다. 시작은 준비단계 상태에서는 신중하지만 그것이 선언되는 순간에는 단순하고 민첩하게 임하라는 것으로 들린다. 소년은 노인을 만날 때마다 시작하는 마음을 매번 다르게 가지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