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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Apr 27. 2024

모르는 채로

0685

비통해지지 않기 위해 기분을 두 번째 서랍 속에 넣어두고 문을 나선다.


잘 익은 열매를 따다가 전깃줄에 걸어두고 헛지휘를 해본다.


이른 아침 새소리가 오늘의 예언인 줄은 정오가 되어 막힌 도로 위 버스 안에서 깨닫는다.


비누칠도 하지 않은 채 샤워기 앞에서 묵념을 한다.


빌어먹을!


그렇게 속고도 또 속는 것은 광주리 가득한 방울토마토 맛이 제각각 이어서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올리브그린색 페인트가 있어서 방문 한쪽을 칠했다.

리드미컬하게

한 방향으로 칠한다.

전체를 한번 칠하고 잠시 눈을 감는다.

페인트 마르는 냄새는 하루가 소멸하는 냄새와 닮았다.

다시

리드미컬하게

한 방향으로 칠한다.

전체를 칠하고 눈을 부릅뜬 채 문을 응시한다.


문이 점차 몸을 뒤틀어 거꾸로 물구나무서더니

곰이 된다.

곰 앞에서는 죽은 척해야 한다.

숨죽이고 지나가길 기다린다.

누워서 보니 다시 문이다.


곰은 지나갈 문이고 문은 내 앞에서 곰이다.


오늘도 미련한 곰 같은 시간이 흐르겠지.

주말인데 불곰 같은 포효도 수줍어 감추고 백곰 같은 풍성한 즐거움도 어설프게 놓쳐 버리고 무료하게 지나가겠지.


거봐! 내가 뭐랬어?


옳은 말은 어제 했었고 후회는 내일 치를 일.


식물에게 밥을 주려고 출근하는 일은 이제 생경하지 않다.


잘 살려고 책상다리를 수시로 청결하게 한다.


복덕방에 들러 서류를 넘겨주고 달력의 다음 장에 방금 떠오른 사람의 이름을 적는다.


잡으려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연기 같은 순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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