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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n 10. 2024

떠나는 이유 2

0729

아는-곧 유명해져 여러분도 알게 될-어떤 소설가가 지리산으로 훌쩍 떠나면서 이렇게 문자를 남긴다.

비우러 갑니다
지우고 올게요


채워진 것들이 너무 많아서

새겨진 것들이 너무 많아서


정기적으로 '덜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비우고 지우고 싶어도 비지 busy 하다는 핑계로 방치하고 있는데 시간을 내서라도 그리하는 그가 부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떠나면 늘 무언가 채워서 돌아오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의 메시지는 이를 우아하게 전복시킨다.


눈에 채우든지 

위를 채우든지

빽을 채우든지


그토록 지나치게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더 새로운 것을 취하려 떠난 시간들이 부끄러워진다.


산을 오르며 몸에 새겨진 묵은 메시지들과 번뇌들을 지우는 그를 상상한다.


노고단 정상에 서서 그가 생각해 낼 수 있을 만한 거대한 쓰레기통에 넣었을 무형의 소유물을 헤아려본다.


삶의 원고지에 적힌 일상의 문장들을 퇴고하는 중입니다


지우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육체를 고통스럽게 다루어야 몸은 솔직하게 응답한다고 했다.


사실 불필요했지.

정녕 지워야했지.


산길을 걷다보면 숲의 잔소리를 듣게 되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맞는 얘기라서 반박도 못한다고 했다.


마치 교회에서 헌금을 아낌없이 내어 바치듯 그렇게 된다고.


기복祈福은 없으니까 뒤끝도 없다고.


그가 보내 온 사진들에는 온통 빈 공간, 허공, 오솔길이었고

그가 보내 온 영상들에는 온통 바람소리, 빗소리, 잎 부딪는 소리뿐이었다.


잘 비우는 것은 잘 채우기 위한 재정비가 아닌, 

삶의 공명共鳴이 노이즈의 방해를 받지 않게 하려는 것.


탁해진 내면의 소리를 보다 깨끗하게 듣기 위한 청소를 위해 떠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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