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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숲오 eSOOPo Jul 25. 2024

은밀한 중복

0774

중복을 먹거리가 아닌 것으로 적절하게 보낼 궁리를 하다가 머리를 깎았다.


수시로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쳐달라고 가볍게 주문했는데  머리 감으러 이동할 때 내려다보니 바닥이 까맣게 수북하다.


온통 번뇌처럼 보인다.


무성하게 고민들이 자라나 가늘게 은폐했구나.


거울을 가장 오래 바라보는 시간이다.


머리를 보라는 건데 오로지 내 표정만 응시한다.


수시로 어색하다.


내 표정이 디자이너의 가위질보다 다양하다니!



이때 웃기는 상상을 하면 안 된다.


멈출 수 없다.


목에 두른 가운을 뒤집어 얼굴을 가릴 수도 없다.


참기 위해 어금니를 물고 과장되게 인상을 쓴다.


캥거루를 생각하지 말아야지.


왜 이 순간 생전에 본 적도 없는 캥거루 일가족이 내게로 달려든다.


그 주머니에 코알라가 들어있을 게 뭐람.


머리를 하고 일하러 가시나요?


침묵하던 디자이너의 아이스브레이킹 첫마디가 설마 당신 백수냐는 에두른 물음이다.


영화 보러 갈 건데요.


그렇다고 했으면 짧을 얘기가


올해 백 세 번째 영화예요


궁금해하지도 않을 부가설명이 안쓰럽다.


업무처럼 바르게 앉아 마블 영화를 보고 나오니 영화 장면과 아까 대화들이 중복되어 떠오른다.


레이어드 된 것들은 언제나 은밀하고 신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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