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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그림자를 보았는가

챌린지 73호

by 이숲오 eSOOPo

그 여름의 끝


이 성 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꽃잎 하나하나가 그림자를 가지고 있어서 놀랍다


모두 꽃으로 고개를 돌릴 때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하얗고 투명한 만발보다 그들의 그늘이 신비롭다


글을 쓰다가도 간혹 글의 해체와 소멸을 상상한다


잘 지어 올린 건물 닮아서 수명이 다한 글을 그린다


낙화처럼 글을 쓰고 싶어
꽃의 그림자처럼 쓰고 싶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짧은 아름다움을 소리치는


바람에 흔들리는 무수한 꽃 아래로 피는 꽃 그림자


꽃만 보면 꽃의 절반만 본 것이라고 비로소 알았다


꽃이 이내 사라질 것을 미리 엄포하는 무수한 서명


차마 그 거룩한 빛 밖의 밝음을 밟지 못하고 비킨다


지난 봄날의 추억을 펼치다가 다시 접기를 반복한 후 어느 날 돌연 비바람이 보자기에 싸서 훔쳐 가지


꽃의 상실만 염려하다가 꽃의 후면을 놓치고 만다


그때까지만이리도 꽃의 그림자를 보고 또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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