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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수첩

0951

by 이숲오 eSOOPo

나를 찾아 길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숭고하다


거기에는 한치의 주저도 원망도 없으니


일상의 위수지역을 넘는 순간 다른 내가 등장한다


이곳의 안정보다 저곳의 불안이 더 희망적이기에


안정들의 틈사이에는 곰팡이가 피어나고

불안들의 언저리에는 무지개가 피어난다


여행자의 몸뚱아리가 거대한 백지가 되어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풍경의 안료에 곱게 물든다


길은 펜이 되어


발바닥에 인각된다 절대 마모되지 않는 조각처럼


어쩌다 마주치는 자연은 혹은 자연과 팔짱낀 인간들은 하는 몸짓마다 하는 언어마다 시가 된다



책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지 않아도 독서가 된다


결코 동행자가 없어도 대화의 상대가 없어도 여행자가 고독하지 않는 까닭은 무수한 자신과의 수다로 목이 쉴 지경이 줄곧이기 때문이다


어찌 여행을 한가한 자의 여유라 치부할 수 있으랴


떠나는 자는 개선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세계를

세계 너머를

세계 내부를

그 안에 뒤뚱거리며 존재하는 나를 개선하기 위해


무수한 낯선 문들을 열고 당기며 제대로 질투한다


질투가 아름답게 작동하는 순간이다


여행하기 전과 후가 동일한 인간은 극히 드물다


등에 진 배낭의 주머니 개수만큼 달라져 돌아온다


여행은 일상의 낡은 공기를 배낭에 담아 고통의 깊이만큼 먼 곳에 가서 버리고 오는 일이다


여행비는 일상의 폐기물처리비용이자 건축비다


여행 후 돌아와 내 안에 건축물하나 올리지 않는 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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