챌린지 17호
다정함의 세계
김 행 숙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기억을 하지 않아야 사는 한 여자가 있고
기억을 해야만 살 수 있는 한 남자가 있다
누가 더 불행할까
누가 더 다행일까
사는 일은 어쩌면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허우적거리는 몸부림일지도 몰라서
기억나는 것은 잊은 것투성이 틈새에서 독버섯처럼 고개를 내밀고 잊힌 것들은 끈질기게 자리한 기억의 영토에서 불사조처럼 날아오르니
기억은 낫 놓고 기역자가 되지 못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기억으로 현재를 견뎌내는가
나는 망각으로 지금을 건너가는가
기억하는 것은 잘 골라 잊은 결과인가
망각하는 것은 잘 몰라 잃은 원인인가
하루만큼의 기억을 삼키고
오늘만킁의 망각을 토한다
젊은 날에는 기억이 환영받을 일이지만
나이 들수록 망각이 축복받은 능력이다
예전에는 기억되지 못함을 서운해 했으나
작금에는 잊혀지지 않음을 서글퍼 하나니
기억은 잊으려할수록 더 또렷해지고
망각은 새기려할수록 더 뚜렷해진다
기억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지 더듬어보면
잘 기억하고 잘 잊는 것도 복이고 운 같다
망각하지 않으면
인간은 죄다 오점투성이의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알바 데 세스페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