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니 Nov 05. 2017

후추

-마법의 가루를 찬양하며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건축가로 일하며 성격의 많은 부분이 변했다. 밤샘을 밥먹듯 하는 생활이 반복되며 한 때 이부자리의 위아래가 바뀌는 것도 못견디던 경도의 결벽증은 왠만한 지저분함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게 되었고, 밥은 그저 배고프면(더하여 시간이 허락될 때) 적당히 때우면 되는 것이 되었다. 당연히 요리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랬던 것이 이탈리아로 상주여행을 떠났다 유학 생활로 이어지면서, 서서히 요리의 세계에 눈을 떴다. 집에서 해먹는 것이 값이 싸기도 했고, 타지 생활이 길어지며 본능적으로 집밥이 그리워진 탓이었다. 종종 제 나라의 요리를 해 주던 다국적의 친구들 덕분에 레시피도 다양해졌다. 덕분에 요리는 일상의 한 축이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한국에 돌아와 다시 직장 생활을 하며 고스란히 증발되고야 말았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있어야 밥을 해먹든 말든 할 것 아닌가!


굳이 독립이라는 것을 하게 된 것은 내 작업을 하겠다라는 대단한 포부에서가 아니라, 작은 일상들을 누리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충분한 잠을 자고, 건강한 밥상을 차려 먹고 하는 아주 단순한 일상의 향유.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한다는 것이 단순히 자유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 모든 역할을 다 감당해야 한다는 어려움을 수반하지만 어쨌든 덕분에 다시 부엌에 설 시간이 생겼다.


그러면서 텅 빈채로 있던 부엌의 선반에 하나 둘 양념이라는 것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하루는 한동안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던 파우더 후추가 떨어졌기에 마침 가게에 있던 이탈리아산 통후추 병을 집어들었다. 오랜만이다 너. 통후추가 집으로 입성한 날, 저녁으로 끓인 어묵탕의 마무리로 후추를 갈아 넣었다. 그랬더니 이게 왠 천지개벽인가? 입 안에서 어디서 날아온지 모를 풍미와 감칠맛이 돈다. 아! 그랬지. 이런 맛이었지. 이탈리아에서 처음 알게 된 원재료의 신선한 맛들. 작은 터치로 끌어올려지는 풍미.


후추 몇 알 덕분에 식탁이 사치스러워졌다. 옛날 아라비아 상인들이 금,은 보다도 비싼 값으로 유럽에 팔아먹었던 것이 이해되고도 남는다. 한때 불로장수의 정력제로 믿기도 했다지.

후추. 이 몸쓸 놈에 요물같으니라고. 네가 최고다.


2017.11.05 서울

매거진의 이전글 학생. 그리고 선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