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과 동등한 인격을 가진 어린이의 말하기
코로나로 아파트 장터가 한참 휴장했다가 오랜만에 개장한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대박 세일한다는 전단지가 각 호마다 붙었다. 붕어빵이 다 팔린 걸 보고 아쉬워하며 장터를 한 바퀴 돌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파트 앞 공원에 마침 바람이 안 불어 30분 정도 신나게 배드민턴을 쳤다. 그러다 "왜 어린이공원에서 배드민턴을 치세요?"라는 여자아이의 질문을 받았다.
"어, 바람이 많이 불어서 여기서 치는 거야."
3학년인지, 5학년인지 가늠이 안 되는 여자아이가 불쑥 건넨 말에 변명하듯 답했다.
“그럼, 우리가 그만해야지.”하며 반려인이 얼른 배드민턴을 멈췄다. 그러고는 반려인이 어린이공원 앞 주의사항이 적힌 게시판을 꼼꼼히 들여다보더니 어른이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없다고 전했다.
집에 돌아와 여자아이의 질문을 헤아려보았다. 어린이공원에서 어른이 배드민턴을 치면 안 되지 않느냐는 말이었다. 아이의 불편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바람 때문에 여기서 친다는 내 입장만 늘어놨다. 넓지 않은 놀이터에서 어른 두 명이 배드민턴을 치는 바람에 자유롭게 뛰놀지 못해서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돌이켜보니 제법 똑똑하고, 용기 있는 어린이였다. 어른들 앞에서 자신의 불편함을 넌지시 말하던 그 아이를 보니 소녀들을 위한 페미니즘 입문서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가 떠올랐다. 여성 위생 용품 브랜드인 ‘위스퍼’에서 ‘#여자답게’라는 구호를 걸고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공저자로 참여한 윤이나 작가에게 ‘여자답게’라는 말은 공격적이거나 강한 문장과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윤이나 작가와 마찬가지로 이 광고 초반의 성인 여성들과 남성, 소년들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다. 이들은 ‘여자답게’ 달리라는 주문에 손과 발을 어색하게 팔랑거리고 머리를 만지거나 대충 움직이며 달렸다.
신기한 일은 이어 등장한 10대 소녀들에게서 일어났다. 감독의 ‘여자답게’ 달려보라는 지시에 소녀들은 팔과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땀을 닦거나 힘껏 공을 던지기도 했다. 여자답게 달려보라는 의미가 어떻게 들렸나는 감독의 질문에 한 소녀는 “최대한 빨리 달리라는 뜻”이라고 답했다. 그 모습을 본 성인 여성들에게 다시 ‘여자답게’ 달리는 의미를 묻자 “나답게 달리는 것”이라고 수정했다. 다시 ‘여자답게’ 달리라는 감독의 요청에 이들은 처음의 과장된 동작을 버리고 가장 빠르고, 힘 있고, 자연스러운 달리기를 펼쳤다. 이 캠페인은 여자다움에 덧씌워진 부정적 의미와 사회적 강요를 분명히 보여주면서도 유쾌하게 교정해냈다.
나는 어릴 때,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내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말해도 된다는 생각을 못할 만큼 주눅 들어 있었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가뜩이나 심장이 약하고 겁이 많은데, 깐깐한 영어선생님 수업이었다. 이름 대신 번호로 학생을 지명하고, 번호의 앞뒤 자리를 무작위로 불러 세우는 바람에 일명 공포의 시간으로 통했다. 그날 공포의 주범은 수동태를 능동태로 바꾸는 문제였다. 나는 답을 연습장에 써놓고, 제발 걸리지 않기를 빌었다. 불행히도 제일 먼저 걸린 나는 입이 안 떨어져 벌벌 떨며 서 있었다. 연습장에 답을 써놓고도. 결국 절반의 아이들이 서 있는 상황이 됐다. 정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 아이가 가까스로 정답을 맞혔고, 그 답은 내 연습장의 답과 똑같았다.
나에게 어른은 무서운 얼굴로 다가왔다. 어른에게 뭔가를 말한다는 건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고, 어른에게 불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따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참았고, 그 참음이 몸과 마음을 아프게 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야 그 불편함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막연하게만 느꼈던 불쾌함, 위축됨, 부당함 같은 감정들이 성차별적 사회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처음에는 말하려다 목이 메었고, 다음엔 더듬거리며 겨우 말을 꺼냈다. 매번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함께하는 사람들은 나를 지지해주었고, 나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말하지 못하면 다음날이라도 불편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는 달라지는 과정에 있다.
도심에서는 ‘어린이공원’을 본 적이 많지 않다. ‘공원’ 하면 모든 세대가 이용하는 공간을 생각한다. 이상하게 대부분의 공원에선 나이 많은 순으로 대장이 된다. 어린이들이 소리를 지르거나 심하게 장난을 치면 어른들이 나서서 야단을 친다. 어린이에게 야단맞은 어른의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날 반려인과 나는 ‘어린이공원’에서 쫓겨났다. 어린이가 자유롭게 노는데 어른이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똑 부러진 여자어린이 덕분에 어른과 동등한 인격을 가진 어린이의 말하기를 폭넓게 사유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린이공원 팻말이 없어졌다. 지자체의 장이 바뀌면서 맘카페도 없애고, 작은 도서관도 많이 폐관하더니 이제 초등학교 앞의 어린이공원 팻말도 빼 버렸다. 보육과 교육에서 공공성을 배제하고, 어린이공원이란 이름을 지워서 어떤 효율과 생산성을 추구하려는지 우려스럽다. 몇 개도 없는 '어린이공원'의 이름을 지운 건 모두의 공원으로 공간의 의미를 확장했다기보다 '어린이'라는 존재를 지운 것이나 다름 없다. 좋은 사회란 나이, 젠더, 장애, 학벌, 재산과 상관없이 모든 시민의 목소리에 동등한 자격을 부여하는 사회다. 어른 시민이 잘못하면, 어린이 시민이 어른 시민에게 야단도 치고 말할 수 있는 사회가 상식이 되면 좋겠다.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미지 출처: Pinterest@김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