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배고파서 먹나요?

내 안의 깊숙한 털 뭉치에 대하여

by 한지원
“나에게 진정한 변화가 온 것은 내 안 제일 깊은 곳에 있던 털 뭉치를 꺼냈을 때이다. 나는 내 마음속에서 사랑을 그리워하고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냉장고 속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배고파서 먹나요?》의 저자 실비아 해스크비츠의 고백이다. 식이장애를 넘어 음식과 즐겁고 새로운 관계 맺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처음에는 몰랐다. 콸콸 쏟아지던 눈물이 컥컥 참을 수 없는 울음으로 폭발하는데도. 감정의 진원지를 도무지 알 수 없어 무작정 단골 가정의학과를 찾았다. 상담하러 왔다고 카운터에 말하고 들어갔다. 자꾸만 먹을 것이 당기고, 쉴 새 없이 먹어댄다고. 배고파서 먹는 게 아니라 심심하고, 답답하고, 그냥 손쉽고 저렴한 사치라서 냉장고 문을 수시로 연다고. 냉장고에 먹을 게 없으면 편의점으로 쪼르르 달려가 달달하고 짭조름한 과자 몇 봉지를 사 와 한자리에서 끝장내고, 밤이나 새벽에도 자다 일어나 먹을 것을 찾는다고. 몇 달 사이 몸무게가 5킬로 이상 늘어 걱정이라고.


어제 갑자기 김밥이 먹고 싶어 김밥을 말다 그만 눈물을 왈칵 쏟았다고. 뜻밖에 엄마와 절연했다는 고백이 툭 튀어나왔다. 주치의께 엄마 얘기를 하는데, 목이 메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또 눈물이 났다. “많이 힘드셨겠네요.” 가만히 경청하던 주치의의 한마디가 답답하던 마음을 비추었다.


재작년 말, 엄마와 절연했다. 내 인생의 절실한 문제에 대한 엄마의 안일하고 무책임한 대처 때문이었다. 엄마와의 절연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와 울분에 휩싸였는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뭔가를 씹어대면서도,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 있냐며 힘들어 보인다는 반려인의 말에도 그냥 입이 당겨서라고 무심히 대꾸했다.


인생의 큰 사건인데,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다. 반려인에게도 말 못 하고 혼자 아팠나 보다. 주체할 수 없이 통곡한 다음 날, 주치의와 상담하다 폭식의 원인이 드러났다. 초등학교 소풍 갈 때마다 우리들 작은 입에 쏙 들어가게 싸주던 엄마 김밥. 소풍 다녀와서도 먹고 다음날 아침까지 넉넉히 먹고 배를 두드리던, 커다란 쟁반에 탑을 쌓듯 올려져있던 그 김밥. 김밥이 나에게 털 뭉치였다. 엄마를 연상하게 만든 내 마음 속 깊은 털 뭉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깨달았다. 원인을 모르던 몇 달간의 폭식이 서서히 멈췄다.


우리는 종종 아픈지, 슬픈지, 외로운지, 불안한지, 화난 줄도 모를 행동을 한다. 가장 아껴야 할 내 감정을 저 멀리 던져놓고, 살뜰히 살펴야 할 몸도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혹사시킨다. 수면 위로 떠오른 감정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맨 밑바닥의 핵심감정을 발견하듯 원인 모를 행동을 자각하고 도움을 청하는 순간이 어쩌면 내 안에 숨겨진 털 뭉치를 발견할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 엄마와의 절연이 내게 엄청난 상실과 고통의 털 뭉치였음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아무 일도 아닌 듯 통째로 삼키면 체한다는 걸 ‘무의식적인 폭식’이 말해주었다.


무심코 먹는다는 건 내 안에 깊숙이 숨겨진 털 뭉치를 삼키는 행위가 아닐까. 우울감과 지루함을 잊으려고 음식을 삼키고, 화나고 속상한 심정을 술로 풀고, 사람과 상황, 돈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마약에 손을 대면 이것 역시 털 뭉치를 삼키는 행위다. 내가 음식의 맛과 향, 씹히는 감각을 느끼면서 먹는지, 아무 생각 없이 흡입하는 자동적이고 습관적이며 충동적인 감정의 폭식인지 살펴보자. 방금 식사했는데도 여전히 음식이나 술, 담배가 당긴다면 잠깐 멈추고 가짜 식욕을 의심해야 한다. 정말 배고픈지, 외롭거나 슬픈 건 아닌지, 불안이나 상실일 수도 있다.



불현듯 끓어오르는 분노나 우울감이 올라오거나 복잡다단한 문제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가만히 눈을 감고 손바닥 위에 ‘물질의 형태’로 분노와 우울, 복잡한 문제를 올려놓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면 자제력을 상실한다. 언제든 우리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전문가를 찾아 상담하거나 마음을 읽어줄 친구에게 전화할 수도 있다. 너무 피곤해서 단 게 당긴다면 편의점으로 달려갈 게 아니라 침대에 눕자. 불안하거나 화가 치밀면 초콜릿이나 커피, 담배나 술 말고 달리기를 하거나 휴대폰 메모장에 감정일기를 써보면 어떨까. 무너진 자존감을 지키는 일은 복닥대는 감정과 마음에 쉴 자리를 마련하는 일에서 시작하니까.






*AI 학습 데이터 활용 금지

*이미지 출처: Pinterest@TremblayAudrey




keyword
화요일 연재
이전 02화관종의 글쓰기를 통해 배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