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노피 마들렌

다 쓴 식재료도 다시 보자.

by 거울새

홈베이커들이 공통으로 겪는 가장 큰 고민은 뭘까.


모두가 각기 다른 고민거리를 갖고 있겠지만, 아마 식재료 재고 관리에 대한 어려움만큼은 이견 없이 한마음으로 공감할 거라 생각한다.


식재료. 그것은 홈베이커들이 만드는 수많은 결과물의 출발점이다. 한 번에 많이 구매하면 저렴하게 살 수 있지만, 가정 내에는 보관할 곳이 충분치 않고, 단기간에 소비하기 어려워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재료도 많다. 그렇다고 매번 소량씩 구매하기엔 얇은 지갑에 묵직한 경제적 압박이 엄습한다. 늘 적당한 가격과 적절한 소비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끝없이 오르는 물가와 하릴없이 썩어가는 식재료 사이에서 홈베이커들은 오늘도 무기력하기만 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매번 새로운 마들렌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식재료를 구매하지만, 먹는 양이 적은 우리 집에서 소비할 수 있는 식재료엔 분명 한계가 있다. 결국, 요즘처럼 날씨가 더울 땐 조금만 방심하면 금세 상태가 나빠져서 너무나 아깝게 식재료를 떠나보내는 일도 잦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다양한 식재료를 조금씩이라도 소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적게 만들어도 조금씩 남는 재료를 완전히 소비하는 건 쉽지 않다. 지금도 우리 집 냉장고엔 빠른 소비가 필요하다 생각되는 재료가 제법 많다. 그리고 그 선봉엔 둘세 데 레체가 있다. 벌써 만든 지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 마들렌에 사용한 후 아직 냉장고 밖을 나선 적이 없었다. 둘세 데 레체를 잔뜩 소비할 만한 마들렌은 없을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게 바로 ‘바노피’였다.


바노피는 ‘바나나’와 ‘토피’의 합성어로 영국을 대표하는 소울푸드인 ‘바노피 파이’의 주재료이다. ‘바노피 파이’는 파이지 혹은 쿠키를 부숴 만든 크러스트 위에 토피, 바나나 슬라이스, 휘핑크림을 올려 완성한다. 사실 보통 토피는 진짜 토피를 쓰는 게 아니라 토피맛이 나는 둘세 데 레체를 이용하는 데다, 마침 얼마 전 사 온 바나나도 있었다. 둘세 데 레체를 소비하기 위한 가을맞이 마들렌을 만들기에 더없이 좋은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생크림이었다. 좀 더 마들렌에 걸맞은 형태로 변화를 줄 순 없을까. 원래는 생크림을 포기하고 향신료를 더해 새로운 느낌을 주려 했다. 하지만 계피에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함께 곁들일 수 있는 독특한 토핑으로 문득 마시멜로가 떠올랐다. 작년 크리스마스에 만든 스모어 마들렌처럼 마시멜로를 표면에 묻혀서 모양을 내면 어떨까. 다이제를 살짝 부숴서 표면에 붙여주면 파이지의 바삭한 식감도 표현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계획이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가벼운 생크림에 비해 마시멜로의 식감이 묵직해서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차라리 생크림 느낌을 포기하자. 반죽 위에 얇게 편 마시멜로를 올리고 그 위에 다이제를 잔뜩 부숴 올리면, 살짝 그을린 스모어 같은 맛과 마시멜로의 쫀득한 식감 그리고 다이제의 바삭함까지 모두 갖춘 새로운 맛을 낼 수 있을 테다. 그렇게 새로운 바노피 마들렌을 향한 여정이 시작됐다.


언제나처럼 마음 같지 않은 여러 순간이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마들렌은 온전하게 만들어졌다. 솔직히 오븐 속에서 정신없이 부글대는 마들렌을 바라보며, 빠르게 새로운 레시피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나약한 내 마음과 다르게 마들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얇게 펼 때도 그렇게나 속을 썩이던 마시멜로는 오븐 속에서 완전히 이성을 잃고 부푸는 듯했지만, 가까스로 최소한의 선을 지켜냈고, 그렇게 바노피를 한가득 담은 바노피 마들렌이 완성됐다.



마들렌을 한입 가득 베어 물자 바나나 향이 잔뜩 밴 둘세 데 레체가 입안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캐러멜화된 쫀득한 마시멜로의 풍미와 약간 짭조름하면서 구수한 감칠맛을 지닌 다이제의 맛이 뒤를 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다채로운 풍미가 입안을 가득 메웠다. 영국인들의 ‘바노피 파이’에 대한 사랑이 미뢰 세포 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생크림을 제외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개인적으로 생크림까지 있었다면 많이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둘세 데 레체는 이제 바닥을 보인다. 마들렌이 맛있어서일까, 아니면 남는 식재료를 해결해서일까.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넘기는 내 마음에 후련함이 담겨있다. 한번 쓴 재료는 웬만하면 한동안 다시 쓰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버려지는 식재료를 아끼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다 쓴 재료도 다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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