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 마들렌

무화과의 심장을 담은 가을의 맛

by 거울새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리 애타게 기다려온 가을인데, 막상 환절기가 시작되니 역시 모든 일이 마음처럼 흘러가진 않는다. 갑작스레 차가워진 날씨에 몸은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에 노곤노곤 녹아내려 마시멜로처럼 바닥에 눌어붙어 있던 몸이 바닥과 이별하길 바랐을 뿐인데, 어째 차가운 바람에 이별을 넘어 조금은 뻣뻣해져 버렸다. 어느새 싸늘해진 저녁 날씨에 관절들이 여기저기 삐걱대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하긴, 원래 환절기 풍경이란 건 으레 이런 거다.


결국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한여름의 더위만 가시고 나면 금방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각 계절엔 각자의 어려움이 있다. 의미 없는 저항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빠르게 변하는 날씨에 발맞추어, 멍충하게 아직 여름에 머물러 있는 내 몸을 어르고 달래서 가을의 몸이 되도록 열심히 설득해 본다.


며칠 전엔 오랜만에 마트에 다녀왔다. 추석이 코 앞으로 다가온 탓인지 마트 곳곳엔 각종 선물 세트가 즐비하게 쌓여 있었고, 다들 약간 상기된 모습으로 들뜬 분위기가 감돌았다. 괜스레 나까지 추석 연휴가 기대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농산물 코너에는 한창 제철인 사과와 고구마가 잔뜩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무화과.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사실 나는 무화과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이제 불호의 영역에선 벗어났지만, 아직 본격적인 호의 영역까진 도달하지 못했다. 매년 그냥 지나치자니 아쉽고, 그렇다고 덜컥 사자니 다 먹을 수 있을까 싶은 그런 과일. 인스타그램에선 하루에도 몇 번씩 무화과를 보고 있었지만, 좀처럼 마트에 발걸음 하지 않다 보니 올해 실물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초록빛이 거의 없이 잘 익은 무화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격도 괜찮고, 상태도 좋아 보이는데, 양이 좀 많은 게 흠이었다. 가뜩이나 상태가 빨리 변하는데 과연 다 먹을 수 있을까. 그래도, 뭐 제철을 놓치고 후회하는 건 성격에 안 맞으니까. 머릿속으로 무화과 소비 계획을 열심히 세우면서 무화과 한 박스를 집으로 데려왔다.


1년 만에 마주한 무화과. 다행히 올해 첫 무화과는 합격이었다. 사실 마트에서 무화과를 고를 때 겉보기에도 짓무르거나 곰팡이가 핀 박스가 더러 있어서 걱정했는데, 박스 아래쪽까지 크게 상태가 좋지 않은 무화과는 없었다. 게다가 이번 무화과는 언제나와 같은 양파 느낌의 들쩍지근한 단맛 위에 제법 상큼한 단맛이 느껴졌다. 내가 무화과에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이번 무화과가 맛있는 걸까. 이 정도면 무리 없이 소비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렇다면 마들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무화과의 맛이 제법 좋다 보니 아무래도 생과 활용에 대한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렇게 무화과의, 무화과에 의한, 무화과를 위한 무화과 마들렌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핵심이 되는 건 얼린 무화과였다. 몇 해 전부터 인터넷상에서 무화과를 납작하게 눌러서 얼려 먹는 영상이 꽤 유행했었는데, 그렇게 얼린 무화과를 그릭 요거트에 올려 먹거나 샐러드 위에 올려 먹는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무화과를 사 오자마자 절반은 바로 얼려뒀는데, 이걸 마들렌에 응용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반으로 자른 무화과에서 마치 무화과의 심장과도 같은 가장 붉은 과육만 조심스레 퍼낸 뒤 랩으로 감싸 동그랗게 모양을 만들어 얼렸다. 그리고 남은 무화과는 곱게 갈아서 수분을 날린 뒤 새콤한 맛이 은근히 감도는 그릭 요거트에 생크림을 섞어 무화과 크림을 만들었다. 반죽은 상큼한 얼린 무화과와 무화과 크림의 부드러운 맛을 묵직하게 받쳐 줄 수 있도록, 브라운 버터와 흑설탕을 사용했고, 반죽 위에는 무화과와 찰떡궁합인 피스타치오를 잔뜩 다져 올렸다.



그렇게 완성된 올해의 무화과 마들렌. 얼린 무화과에서는 마치 생과처럼 상큼한 단맛이 터져 나왔고, 소량의 설탕과 브랜디로 맛을 살린 무화과 크림은 지극히 부드러운 무화과의 풍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콧속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브라운 버터의 매력과 고소한 피스타치오의 오독오독한 식감이 조화를 이루었다. 거기에 킥으로 준비한 소금에 절인 후추가 간간이 알싸한 향을 더해주니 화려하고 화사한 가을의 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올해는 유독 추석 연휴가 긴데, 연휴를 앞두고 사건, 사고가 참 많은 것 같다. 모쪼록 다들 무탈하게 푹 쉬고 행복한 추석 연휴 보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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