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블랑 마들렌

가을엔 역시 산

by 거울새

올해는 보늬밤 조림(이하 보늬밤)을 만들지 않기로 했다.


우리 집은 계절마다 매년 꾸준히 만드는 저장음식이 있다. 봄에는 생 명이나물로 명이나물 장아찌를 담고, 여름에는 푸릇푸릇한 매실로 새콤달콤한 매실청을 담근다. 가을이 되면 실하고 상태 좋은 밤을 골라 보늬밤을 만들고 겨울엔 향긋한 유자로 유자청을 담근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듯한 계절에 최소한의 의미를 더한다. 하지만, 몇 년째 어머니와 내 건강 상태에 적신호가 들어와 있는 게 문제였을까. 계절마다 부침을 겪는 건 매년 으레 있는 일이지만, 올해는 느낌이 뭔가 달랐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지만, 나의 삶에 알맞은 속도로 걷는 일은 여전히 서툴다. 게다가 요샌 어머니도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으시니, 서로의 몸 상태가 엇박자를 타기 일쑤였다. 어머니 역시 생각지 않은 몸 상태에 무리하시는 일이 잦았다. 때문에 올해는 뭔가 겨우겨우 버텨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올해는 매실에 이어 보늬밤도 생략하기로 했다. 계절을 천천히 따라가는 건 좋지만, 역시 계절에 쫓기는 건 사양하고 싶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추석이 코 앞까지 다가왔는데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올해 추석은 따로 명절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저 연휴가 너무 길어서 먹을거리가 부족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 정도가 전부였다. 사실 추석 마들렌도 만들지 말까 잠깐 고민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기왕 만드는 건데 추석 분위기 정도는 내자는 마음으로 이번 추석 마들렌을 준비했다.


그렇게 준비한 이번 추석 마들렌은 바로 몽블랑 마들렌이다.


사실 몽블랑 마들렌은 여름부터 꾸준히 고민하던 마들렌이었다. 올해는 보늬밤을 만들지 않기로 했지만, 다행히 작년에 만들어 보관해 두었던 보늬밤 한 병이 냉장고 한쪽 구석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당도를 적절히 조절하고 진공 상태로 보관했기 때문에 더없이 온전한 상태였다. 그렇게 올 가을엔 보늬밤으로 만든 몽블랑을 꼭 만들겠노라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추석을 맞아 만들기에 제격인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계획을 진행하게 되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몸 상태를 고려해서 상당 부분 타협을 거쳤지만, 그래도 준비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일단 이번 몽블랑의 주제는 ‘낮달’이었다. 파스텔 톤의 은은한 보늬밤 크림 안에 떠 있는 연한 노란색의 달, 그리고 그걸 감싸고 있는 몽블랑. 추석과 몽블랑,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단단한 보늬밤 페이스트와 은은하고 부드러운 보늬밤 크림, 그리고 연한 노란빛의 달이 필요했다. 우선 배를 앙증맞게 조각해서 유자청에 조려냈고, 보늬밤은 페이스트와 크림 사이에 선명한 맛 차이를 위해 껍질째 곱게 갈아내어 다양한 방법으로 가공했다. 그렇게 재료 준비만 며칠을 하고 나니 이미 추석 당일이 지나있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에도 마들렌이 완성되지 않자,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아직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남아있었다.


머랭.


몽블랑 마들렌에 가장 큰 과제는 바삭한 머랭을 더하는 것이다. 바삭한 머랭은 오븐 속에서 타기 쉬웠고, 필링 속에선 금방 흐물흐물해졌다. 근데, 얼마 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바로 마시멜로를 이용하는 것. 전자레인지에 가열한 마시멜로를 냉동실에 그대로 얼리면 마치 머랭처럼 바삭한 식감이 된다. 전자레인지에 가열하고, 마들렌에 묻혀 얼린다. 간단한 이야기다. 하지만, 완성된 마들렌 위에 시도해야 했기에 기회는 한정적이었고, 이론과 실제는 무척 달랐다.



다행히 밤송이를 꼭 닮은 몽블랑을 완성했다. 연휴의 마지막 날, 공들여 만든 달이 무사히 떠올랐다. 버터를 살짝 섞은 보늬밤 페이스트에선 은은한 우유의 풍미가 풍겼다. 그와 함께 춤을 추는 건 보늬밤의 풍미. 곱게 체에 내린 보늬밤과 한번 볶아 맛이 진해진 보늬밤 가루가 뒤섞여 진한 밤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반면 크림은 좀 더 산뜻한 느낌이었다. 보늬밤에 무가당 연유, 생크림을 섞어 느끼하지 않으면서 농후한 풍미를 살렸다. 그와 함께하는 건 유자. 달처럼 떠오른 배를 유자청에 조려냈고, 크림에는 유자청에서 건진 껍질을 잘게 다져 넣었다. 유자 향이 감도는 적당히 상큼한 크림의 맛은 또 다른 보늬밤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흔히 밤과자는 바밤바 맛이라고 하지만, 보늬밤은 그 족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 마시멜로와 함께한 다채롭고 농후한 매력적인 가을의 맛. 올해는 보늬밤을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입안 가득 퍼지는 가을에 고민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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