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약사 Aug 16. 2018

그 누구에게도 결코 무해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

《내게 무해한 사람》 ㅡ 최은영






이미 그때 이 연애의 끝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기 직전의 연애,
겉으로는 누구의 것보다도 견고해 보이던 그 작은 성이
이제 산산조각날 것이라는 예감.
그랬기에 최선을 다해서 마지막을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최은영. ─  그녀의 처음 접하였을 때, 나는 보석같이 빛나는 괴물같은 신인이 나타났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두번째 소설집이 출간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고민도 없이 그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이렇게 처녀작부터 나를 빠져들게 만들었던 작가가 있었을까. 그녀의 첫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접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의 두번째 소설집은 나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를 달아 놓는다.



그녀의 소설은 참으로 섬세하다. 살짝 건들이기만 해도 바스락,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연약하고 섬세한 감성이 있다. 하지만 나약하지만은 않은 것이 또한 그녀의 소설이다. 그 바스락거리는 유약함 속에 깃든 온정과 강인함을 놓칠수 없다. 그리하여 ─ 그토록 섬세한 감정의 결이, 이렇게 묵직하게, 마치 고무판화 새기듯이 독자의 가슴에 남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역시 놀라운 작가가 아닐 수 없다.





기다림은 언제나
가슴이 뻐근할 만큼 고통스러운 즐거움이었다.





 정제되고 깔끔한 문체, 한 순간도 놓치게 하지 않는 스토리의 탄탄한 짜임새,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 묘사, 대놓고 꾸며내지 않아도 독자의 가슴이 깊숙하게 스며드는 문장들. 그녀의 소설은 가슴을 움켜쥐고 보게 된다.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졌다가, 다시금 따뜻하게 풀어졌다가, 돌아갈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가, 또다시 그 찢어진 자리에 새살이 돋아나는 ─ 구석지고 외진 어둠을 직시해야하는 불편함과, 그 구석지고 서늘한 곳에도 희미하지만 분명 따뜻한 빛줄기가 있다는 온기가 늘 공존하는 소설.




 역시 그녀는 보석같이 빛나는 괴물같은 신인이다. 아니, 이제는 신인이라는 타이틀은 떼어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애를 껴안아 책의 귀퉁이를 접듯이
시간의 한 부분을 접고 싶었다.
언젠가 다시 펴볼 수 있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p40.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있어. 걷는 것 말고는 하는 일도 없지만 그저 같이 있어서 좋다는 것을, 어딜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헤어지기 싫어서 이러고 있다는 것을.




p99.

기다림을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기다린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p136.

사람은 변할 수 있어.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남을 변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은.



p136.

타고난 부분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같은 일을 경험하더라도 해석하고 반응하고 회복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p138.

마냥 혼자였지. 마냥 혼자였어. 그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였던 사람처럼 혼자였어.




p152.

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p154.

얼마나 많은 괴로움이 지나야 삶이라는 걸 살 수 있을까.




p156.

나는 사람이 사랑한다는 것을 알지 못해. 어쩌면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무서운 일이라고,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아무 짓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p161.

피치 못할 선택을 한 사람들에게 자신들 삶의 모순을 또박또박 말하는 건 잔인한 짓이 될 테니. 그 시간들을 거치지 않은 인간으로서 그런 비판을 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을 테니까.




p163.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겠죠. 어쩌다 저런 인생 살게 됐나 싶을 거예요. 근데 있잖아요. 최선을 다했던 거예요, 우리 모두, 순간순간. 그게 최선이었던 거예요. 포기하지도 않은 거예요."




p179.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p181.

사랑만큼 불공평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비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그래서.




p202.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많은 경우 옳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상을 알아갈수록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p209.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p223.

산다는 건 이상한 종류의 마술같다고 혜인은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존재가 나타나 함께하다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검고 텅 빈 상자에서 흰 비둘기가 나왔다가도 마술사의 손길 한번으로 사라지듯이. 보통의 마술에서는 마술사가 사라진 비둘기를 되살려내지만, 삶이라는 마술은 그런 역행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딘.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마술. 그건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는 가지만 다시 무에서 유로는 가지 않는 분명한 법칙을 따랐다.




p225.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쉽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막으면 막아지고 닫으면 닫히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러면 인간은 얼마나 가벼워질까.




p273.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투명하게 알아낼 수 있는 세상의 일이 얼마나 될까. 나는 눈을 감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제 그녀의 곁에 같이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p282.

착하게 말고 자유롭게 살아, 언니. 울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싫어.




p300.

넌 네 삶을 살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은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을 곁에 남겨가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