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독과 우울과 행복의 아이러니 (3)
강하게 마음을 먹고 나니 조금씩 자신감이 회복되었다. 비록 회음부가 회복이 안되어서 혼자서 방석을 들고 돌아다녀야 했지만, 누가 뭐라든 나의 아기를 위해서 모르는 건 무조건 사람을 붙잡고 몇 번이든 물었다. 때로는 그것도 모르냐는 눈치도 받았었고, 뭐 이런걸 물어보지 하는 싸늘한 분위기도 느낀적도 있었지만, 그런 낯뜨거움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 품에는 너무나도 작고 소중한 새 생명이 숨을 쉬고 있었고, 나에게는 이 아이를 키워나가야 할 의무가 지워졌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 의무는 누가 나에게 지워준 것이 아니었다. 내 스스로 그 의무 속으로 기어들어가 직접 내 등에 실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주 기쁘고 간절한 마음으로.
악몽같았던 조리원 1주차가 끝나갈 즈음부터는 꽤 많은 것을 알게되었다. 아기 목욕시키는 법, 아기 우유먹일때의 적당한 젖병의 각도와 자세, 그리고 그 각도와 자세는 아기마다 정말 다양하다는 것, 조리원 퇴소 후 아이 위생관리 방법 등등. 눈물만 흐르던 눈에서 이제 빛과 생기가 조금씩 돌기 시작할 무렵, 나의 눈이 빛나다못해 벌겋게 변해 있는 것을 보았다.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 쪽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의 부족한 의학지식으로도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이것은 결막염이다.
바로 남편에게 전화해서 안약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또다시 전화기를 붙잡고 울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 너무 힘들었는데, 힘들어서 혼자 울었을 뿐인데, 왜 나는 더 아파야 하냐고─. 물론 그때 눈물로 힘들어했던 것이 결막염 하나만 가지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잠복고환, 황달, 설소대 등등 갓 태어난 아기의 작은 문제들까지 포함해서 뭔가 혼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별것도 아닌 일들에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그 때는 뭐가 그리도 서럽고 힘들었는지. 조금만 더 그 순간만의 포근한 행복을 느끼면서 편안하게 생각해도 되었을텐데─.
결국 나는 결막염으로 당분간 또 수유콜은 노콜로 걸어두고 방 안에서만 지냈다. 혹시 다른 산모나 아기들에게 옮길수도 있으니까. 소문으로만 들었던 조리원 마사지조차도 거의 받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우리 아이에게 모유수유 역시 할수 없었다. 출산 직후부터 회음부 회복때문에 항생제와 진통제를 계속 투여 했었기 때문이기 했고, 그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체질 탓인지, 항생제를 떼고 나서 유축을 해보아도 젖이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겨우 유축한 10ml도 안되는 적은 양의 초유만 젖병에 담아서 줄수 있었다. 단유의 고통이 없었다는 점에서 축복일수도 있으나, 지금도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 모유를 거의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을 남는다.
결막염으로 몇 일을 못봤지만 아이는 그 몇일 동안에도 쑥쑥 잘 자라 주었고, 나도 이제는 틈틈이 마사지도 받으러 갈 수 있었다. 조리원 3주차 ─ 이제 조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목례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아무것도 모르던 멍청이에서 이제 꽤 똑똑한 엄마가 된 것 같은 유치한 자만심도 생겨났다. 집에 가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으로 착착 그려졌고, 이 스케줄대로 아이을 잘 케어 할수 있겠다는 자심감도 많이 붙었다. 3주가 뭐라고, 그토록 울고 불고 아무것도 못할것 같았던 내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 그렇다. 나는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조리원 퇴소 1주일만에 이 자신감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