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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Nov 29. 2017

'기억'이라는 이름의 배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ㅡ 줄리언 반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




 줄리언 반스. 우연한 만남에서 빚어지는 강렬한 충격은 언제나 경이롭다못해 소름이 돋곤 한다. 나에게 줄리언 반스는 그런 작가이다. 몇 년전 아무 생각없이 집어든 책 한 권, 그 책은 나를 그에게 빠져들게 하고 말았다. ─ 그렇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나와 줄리언 반스의 첫만남이었고 나는 그 강렬한 첫인상에 이끌려 그 이후로 그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우리가 어찌 알 수 있었을까.
우리가 닭장에서 풀려난다 한들,
처음엔 그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는
더 큰 다른 닭장으로 결국 들어가게 될 텐데.






 예상을 뒤엎는 반전소설. 내가 이 책에 가졌던 첫인상은 그랬다. '이런 이야기이겠지'라고 생각하는 뻔한 플롯에서 갑자기 퍽! 뒷통수를 후려치는 결말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도 그 뒷통수의 충격으로 얼얼해지는 소설. 소설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맛있고 자극적인 음식을 맛보는 듯한 소설들도 있다. 글의 전개가 달콤하거나 짭짤하게 맛이 있어서, 정말 그 맛에 이끌려 읽게 되는 소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런 맛있는 소설은 아닐 것이다. 중후반까지도, 뭔가 철학적이고 난해하고 현학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글자를 꼬깃꼬깃 씹어나가는 기분. 그 글자의 맛은 때론 텁텁하고 때론 시그럽기 까지해서 뱉어내고 싶은 기분마저 들게 하는 오묘한 맛. 하지만 이상하게 집착을 가지고 그 맛을 질겅질겅 씹어나가는 맛. 무슨맛인지 모르겠는 맛. 어려운 맛. ─ 그러다가 마지막 한 순간, 강렬한 맛이 솟구쳐서 "우악! 이게 뭐야!"하게 되는 맛. 뱉어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씹어 넘겨 버려서 차마 뱉어낼 수도 없는 맛.





p162.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뒀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플롯 자체는 조금 통속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던 이후로 몇번을 다시 읽었을때, 두번째, 세번째부터는 첫번째만큼은 강렬한 충격은 아니었다. 반전을 위한 반전이냐고 살짝 비꼬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 이 소설은 그렇게 받아들이기엔 그 깊이가 너무 깊다.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는 또다른 유명한 소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과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자기자신을 기만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나가는 진행이 이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을까. 학창시절의 '역사'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되어, 그 역사라는 거시적 관점이 '개인의 기억'으로 좁혀나가는 과정이 이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 있을까. 소설에 등장한 어떤 사람, 어떤 대사도 흘려 들을 종류의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주제로 통합되는 치밀함. ─ 그렇다. 줄리언 반스는 치밀한 작가이다. 치밀하게 단어를 나열하고, 치밀한게 스토리를 정렬하고 재구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가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대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대는 것.






 기억의 배반. 나 자신에 의한 스스로의 기만. 내가 알고 있는 과거는 과연 진짜 과거인건지. 내가 알고 있는 나는 진짜 나인 것인지. 시간이 한 인간을, 아니 어쩌면 한 인간이 시간을 이용하여 얼마나 자기자신과 주변 모두를 바꿔놓을 수 있는지. ─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파급효과란─! 




 아무 생각없이 자기 자신을 포장해서 내보이길 좋아하고 그런 기억과 환상 속에서 자기자신과 타인에 대해 합리화와 조작이 가능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자기 가슴을 찌르는 기분으로 분명히 목도해야 할 주제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 별거 아닌듯한, 고작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던 한 개인의 단순한 언행이 어떤 결과를 불러들일수 있는가에 대한 책임 ─ 우리는 잊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혹시 이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도 줄리언 반스의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면,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추천하고 싶다. 재미나 충격의 관점으로라면 전자의 소설이 재미야 있겠지만, 난 역시 줄리언 반스의 진정한 면모는 후자에서 더 드러나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p100.

인생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느나? 얼마간은 성취를, 얼마간은 실망을 맛보는 것.




p101.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p153.

나의 삶엔 늘어남이 있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더하기만 있었을까.





p165.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81.

인생은 단순히 더하고 빼는 문제가 아니다. 상실의, 혹은 실패의 축적과 곱셈이다.




p263.

우리의 기억은, 아니 우리가 기억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얼마나 자주 우리를 기만하고 농락하는가. 그런 기억에 의존해 진리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이성이란 얼마나 얄팍하고 안이한가. ㅡ 옮긴이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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