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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약사 Mar 13. 2018

서늘하고 창백한 기억의 조각들

《창백한 언덕 풍경》 ㅡ 가즈오 이시구로




이따금 과거를 돌아보는 게 좋단다.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거든.




 한 때 가즈오 이시구로에 꽂혔었다. 일단 그의 "녹턴"으로 시작하여 "남아있는 나날들"에서 반했었고, 그리하여 나의 손길은 그의 처녀작인 "창백한 언덕 풍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에게 반하고야 말았다!




 처녀작이 이 정도라니 ─ . 책의 마지막을 내려놓으면서 드는 생각이었다. 흔히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은 조금 어려운 느낌이 없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어쩌면 그런 독자들에게 제일 먼저 소개하고 싶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이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그의 최근작으로 갈수록 소설의 난이도(?)가 조금씩 더 올라가는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의 첫 작품이 이 소설은 다른 그의 작품들에 비해서 쉽게 읽히는 편이다.






어떤 사람이 중요한 경험을 했는가 아닌가는
그 사람의 나이와는 상관이 없어요.
백 살이 되어도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도 있다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놓고 읽을 수 있을법하게, 그 정도로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라고 말해두고 싶다. 시작부터 난해한 가족관계의 설정부터 시작되니 말이다. 화자는 제2차 세계대전말 히로시마 원폭을 경험한 일본인으로 지금은 미국으로 와서 살고 있는 나이 지긋한 여성이다. 그리고 그녀가 재혼한 두번째 남편(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딸과의 대화와 그에 따른 화자의 회상이 소설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그녀에겐 첫번째 남편(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게이코라는 첫째딸이 있으나, 그녀는 극심한 정신적 문제를 안고서 결국 자살이라는 길을 택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시작부터 음울하다. 그리고 그녀의 회상 속의 기억들도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다. 하지만 참 신기하다. 원폭 바로 직후의 전후의 모습을 그려내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장들 ─ 그리고 그것은 화자가 회상하는 화자의 과거의 모습 ─이 참 담담하다. 전쟁을 독하게 비난하지도, 전후의 궁핍함에 대해서 처절하게 힘들어하지도 않는다. 그냥 ─ 담담하다. 



 어떻게 그렇게 담담할수 있나,라는 생각을 하면, 딸이 자살하고도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일수 있나, 하는 궁금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거기에 이 소설의 매력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전후의 처절한 모습들을 그저 수용하는 태도로, 심지어 희망까지 담고서, 그렇게 담백하면서도 창백하고 을씨년스럽게 묘사하는 그의 시선이. 복합적이면서도 납득이 가고야마는, 참 매력적이다.





만약 사람들이 희망을 포기했다면 말이죠.
이건 모두 여전히 허물어진 잔해로 남아 있을 거예요.





 화자의 과거의 여자, 창백한 풍경속에, 창백한 언덕속에서, 딸 하나와 외따로 살고 있던 그 여자 사치코. 화자는 새삼스럽게 딸과의 대화를 하다가 그녀와 그녀의 딸, 마리코를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어딘지 모르게 진실되어 보이면서도, '기억'이기에 어딘지 모르게 가장되고 왜곡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남기는 면이 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분명히 회상의 장면이기에 화자의 딸 게이코가 아닌 마리코여야 할 장면에서, 화자는 그 딸을 "게이코"라고 부르는 모습을 보게된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하나의 큰 물음표를 남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사치코란 과연 과거의 실제 존재한 인물인 걸까. 아니면 화자의 기억속에서 만든 화자의 과거인걸까. 아니면 과거에 사치코를 말리던 과거의 자기자신이, 결국은 사치코와 다를바 없는 결정을 하고야 만 것일까. 그리하여 화자는 지금에 와서 그때의 사치코와 마리코를 회상하면서, 그녀의 선택과 결정이 그녀의 딸 게이코에서 미쳤을 영향에 대해서 새삼 돌이켜 보고 있는 것일까.



 늘 그렇듯,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어딘지 모르게 '마침표'가 아닌, 길고 긴 실선 하나를 그으면서 마무리가 지어지는 것 같다. 그 실선 역시 끝이 모호하게 점점 옅어지면서 사라지는 그런 류의 선이다. 이 소설도 그렇다. 말끔하고 산뜻한 결론을 기대하긴 어렵다. 모든 것은 독자에게 넘겨진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의 소설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소설 속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 그들의 삶의 자세를 통해서 ─ . 






체스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건
킹이 결국 코너에 몰렸을 때가 아니다.
체스를 두는 사람이 전략을 세우는 걸 포기하는 순간
게임은 끝나는 거나 다름없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서늘하고 음울하고, 그리하여 주인공 화자가 바라본 창백한 언덕의 풍경마냥 창백하지만, 그렇게 쓸쓸하지만은 않은 것은, 그 회상을 함께 경험하면서 그렇게 되어온 모든 과정에서 누구 하나 탓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는 사회 속에서 개개인 하나하나는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갈 뿐이라고. 그 길에, 희망이 없지만은 않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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