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구비 Sep 28. 2024

[단편소설]비밀을 말해야 할 때

"치료가 잘 되려면 역시 그것도 이야기해야겠죠?"

머뭇거리던 환자가 한숨을 쉬며 확인하고 싶다는 듯 K쳐다본다. 자기를 드러내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상대가 나를 무시하거나 비난하거나 혐오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무관심할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K 가급적 떠오르는 대로 가감 없이 이야기하도록 환자들을 격려하고 그 노력을 치하하곤 한다. 

그날 P에게도 역시 그렇게 했다. P는 다부진 체격에 몸에 잘 맞는 카 코트를 입고 있는 중년 남자였다. 늘어진 어깨가 지쳐 보였지만 검정 안경테 너머로 깊은 눈이 아직 반짝이고 있었다. K는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궁금해했다. 상실, 분노, 수치, 슬픔, 공포……

“잠도 오지 않고 밥맛도 없어요. 3년 동안 만나던 사람이 있었는데 아내한테 걸렸어요. 그 뒤로 퇴근하면 바로 집에 가야 하고, 자기 전까지 매일매일 아내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자기가 느끼는 배신감과 울분, 의심 같은 것들에 대해서요. 저한테 죽어버리라며 울부짖었다가 냉담하게 이야기했다가 이혼 서류를 가져왔다가 다시 생각해 보자고 했다가…… 스트레스를 받지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여기에 찾아온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어떤 문제로 오셨나요?”

“애인과 헤어져서 너무 힘들어요."

"아, 그랬군요."

한 박자 늦었지만 K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그전에도 제가 한 번, 상대가 두 번 이래서는 안 된다고 헤어지자고 했던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한 달 이상 헤어져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랑 삼자대면을 했었어요. 아내가 그랬어요. 관계를 정리하지 않으면, 효진이 남편에게 알리겠다고요. 저는 아내가 효진이에게 복수하기 위해 당연히 남편에게 알릴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그러지 않았어요. 그때 깨달았지요. 아내는 효진이가 이혼하기를 바라지 않는구나. 그리고 그 만남 후에 효진이는 저와 연락을 끊어버렸지요.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도 확인하지 않고, 이메일도 읽지 않아요. 이혼에 관한 한 아내와 효진이가 뜻을 같았던 거지요. 효진이가 내가 아닌 남편을 택했다고 상상하니 미칠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해요. 그게 여기 찾아온 이유입니다. 남자 선생님이니까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잘 이해할 거라고 이야기할 때, K에게 불쾌한 느낌이 지나갔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그는 치료자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을 한다. 진료실 문을 나서는 P는 들어올 때보다 표정이 편안해 보였고, 그것이 K의 기분을 나아지게 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P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K에게 단아한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는 K를 훑어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미소를 머금고 말하기 시작했다.

“효진이는 대학 후배였어요. 저보다 두 살 어린데,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지요? 처음에는 그저 궁금했어요. 내가 이런 여자의 마음을 살 만한 남자인지 아닌지. 효진이는 학부 때 인기가 많았거든요. 효진이 남편은 나와 달리 고시에 떨어지고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걸 알게 되고서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거절을 받더라도 내게는 돌아갈 아내가 있었으니까, 효진이는 내가 싫은 게 아니라 외도가 싫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그래서 멍청했던 대학생 때와는 다르게 자신감이 생겼 거예요.

P는 상체를 기울여 다가오더니, 마치 K에게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주겠다는 듯한 태도로 말을 했다.

“외도를 하려면 불안을 잘 견뎌야 돼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누가 나를 보고 남편에게 알린 게 아닌가 가슴이 철렁했어요. 이러다 칼 맞는 게 아닐까 무서웠어요. 나는 가정을 지키고 싶은데, 나중에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니까 효진이가 매달리고 직장에 투서라도 하면 어떡하나 두려웠어요. 반대로 나는 아내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효진이는 돌아가겠다고 할까 봐 불안했어요. 지금은 그 불안이 현실로 된 거네요.”

P는 씁쓸한 표정으로 물러나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잠시 침묵하더니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마흔다섯에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어야 했다고. 그런데 바보 같은 서른 살에 배우자를 선택하고 아이를 낳고 우리에게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잖아요. 나는 결혼 전에 여자와 오래 교제한 경험이 없었어요. 홀어머니 아래에서 가난하게 자라 늘 남들보다 뒤처진 기분이었고 마음에 여유가 없었거든요. 퇴근하고도 몰래 과외를 두세 개씩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아내는 사수 소개로 만났는데, 어리고, 예뻐 보였고, 미술을 하는 것도 여성스러워 보였지요. 그렇지만 결혼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돈 문제로 많이 다투게 됐어요, 뻔한 다툼 아시죠, 여자는 돈이 이것뿐이냐 부족하다 불평하고 남자는 돈을 어디에 써버리는 거냐 못마땅해하는. 별 일 아닌 걸로 불같이 화를 내는 감정 기복에,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서 주위 사람들 험담을 늘어놓는  질려 버렸죠. 어떤 사람들은 신의를 지켜서 아내와 말년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에요. 황혼 이혼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난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아요. 내게 잃을 것은 오직 딸뿐이에요. 딸에게만 이해받을 수 있다면 잃을 게 없어요. 그런데 정말 딸 때문에 성적으로 죽어버린 삶을 이대로 견뎌야 하는 건가. 인생의 시기에 따라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가 언젠가 오지 않을까. 한 사람과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낳는 것보다 다양한 사람과 사이에서 얻는 게 생존 경쟁에 가장 유리한 거 아닌가요? 하긴, 미래를 생각할 것도 없이, 이미 과거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 살았잖아요.”

K는 P가 이제껏 부인을 속여온 사람이지만 과감하게 정직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후회와 내적 갈등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러다가도 배우자의 부정으로 일상이 무너져 내리고 만 다른 환자들이 생각났다. 온전히 P의 편에 서서 공감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그 뒤 몇 번의 만남 내내 P는 이별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가에 대해서 되풀이해 이야기했다. 일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공황발작과 비슷하게 숨이 답답해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에 시달렸으며, 잠들기 전에 술을 자주 찾았다. 그동안 가려져 있던 인생의 불행이 여실히 느껴졌다. 대화할 수 없는 아내, 점점 멀어지고 있는 딸, 그가 어떤 보답도 하기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경쟁하는 관계일 뿐 친구가 아닌 사람들. 그는 일에 몰두했고 조직에서 인정받았지만 친밀한 관계는 거의 전혀 없었다. 자신을 이용하고 공을 가로챈다 느껴서 상관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P가 제치고 승진한 동기들은 그를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이런 인생에 그녀마저 없어진다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이기에 자기 운명을 원망했다.

K는 그가 이 경험에서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서, 이를테면 지금이 바로 다른 남자들과 보다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볼 때가 아닌지, 넌지시 말을 던져 보았다. P는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K는 주제 넘는 소리로 성급한 개입을 한 것 같아 물러났다.    

한 달이 지나서 P는 처음으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차피 잘된 일일지도 몰라요. 효진이를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우리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을 때 서로 가장 사랑했던 것 같다. 물론 사귀면서 그녀와 더 가까워졌고 특별한 사이가 되어서 좋았어요. 그렇지만 나랑 사귄다는 건 그만큼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않은 여자라는 거고, 그게 매력을 반감시켰어요. 어느 날 문득, 내가 결코 결혼하고 싶지 않은, 무섭고 이기적인 여자가 보이는 거예요. 상대도 아마 나에 대해 똑같이 느꼈겠지요. 그렇게 점점 서로에게 끌리지 않는 기분이 되어 끝맺는 거보다 지금 끝나는 게 나아요. 이런 만남에 자식을 걸 가치가 없어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감정이에요.”

K는 P가 상실의 순기능을 말하는 것이 반가웠다. 그는 그것을 마음이 회복되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효진이는 나를 만나기 전에도 남자친구가 있었어요. 이제 또 다른 남자에게 기대고 있을지도 모르죠. 저도 지난주에 여자인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이 일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기분이 좀 나아지더군요. 그 친구랑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냥 여자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 주니까, 기분이 나아졌어요.”

이 말을 듣고 K는 조금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면 잘됐다고, 자신의 역할은 누군가의 도덕성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자제했다. 젊었을 때 그 역시 실연을 당하고 나면 이성인 친구를 만나 위로를 듣는 게 좋았었지 않은가.


다음 만남에서 P는 표정이 두드러지게 밝아져 있었다.

“이제 예전 같은 기분으로 돌아왔어요. 건강했을 때랑 똑같아요. 더 이상 치료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오늘은 어떤 마음으로 오셨나요?”

문제가 해결되면 말없이 오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에 K는 그가 왜 왔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도움을 받았는데 아무 말도 없이 갑자기 나오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인사를 하려고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비밀은 꼭 잘 지켜주길 바랍니다.”

“환자의 비밀을 지키는 것은 저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좋아진 것 같으세요?”

“그동안 치료를 받았으니까요. 다 선생님 덕분이지요.”

P는 기분만 나아진 것이 아니라 K를 대하는 태도도 바뀌어 있었다. 더 예의바르게 거리를 두고 대했고 분명 숨기는 비밀이 있어 보였다 - 아무래도 효진이라는 여성과 재회를 했거나, 아니면 위로를 해주었던 새로운 여성과 교제를 시작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나아졌건, 환자가 더 이상 괴롭지 않다면 K가 할 일은 끝이 났으므로 캐묻지 않기로 했다. P는 고통 속에서 누구와도 나누기 어려웠던 속 이야기를 했지만, 이제는 자기에게 약점이 될 만한 생각과 감정을 누군가와 나눌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K는 이와 같은 마지막 만남에 익숙했다. 그럼에도 마치 친했던 친구가 멀어져 갈 때처럼 이따금 슬픈 감정이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