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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구비 Oct 01. 2024

[단편소설]낮은 자리에 서 있기

K는 노년기 환자들을 만나면 그들의 젊은 시절을 곧잘 상상해 본다. 이제 막 60대에 들어선 J의 세월을 되감아 보면, 균형 잡힌 이목구비에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성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파 보이게 말랐고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경제적으로도 곤경에 처해 있는지 전자 차트에 본인 부담금이 없는 '의료 급여 1종'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는 지금 약을 먹고 하루 종일 자고 싶어요. 눈을 뜨고 싶지 않아요. 저를 믿고 돈을 빌려주었던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이 큰 폐를 끼쳤지요. 어릴 때 버리고 나온 아이들한테까지 염치없이 빚을 졌어요. 제가 일을 해서 조금이라도 돈을 벌면 도움이 될까 했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식당에 한 번 나갔지만 거기서 도움도 못 되고 피해를 주는 것 같았고요. 하루 하고 나니 몸이 너무나 아프고, 다음날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어서 죄송하지만 못 하겠다고 바로 그만뒀어요.”

K는 그녀가 전형적인 수급자 환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버렸든지 버림을 받았든지 가족 없이 혼자 살고, 일을 하지 않고 나라 보조금으로 생활하며, 술을 마시고 건강관리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병원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 그저 안쓰럽게만 바라보기에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 버리고 나온 애들한테까지 빚을 졌다고?

어떤 의사는 치료에 보람을 느끼지 못해 그들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고, 어떤 의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외래 진료와 입원 치료를 자주 해주면서 매출을 올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다수의 평범한 의사들처럼 K는 그들을 여타 환자와 똑같이 대하려고 노력했으, 이런 의문을 갖고 있었다.

‘특별히 싫어하지 않을 수는 있어. 그런데  환자들을  특별히 더 흥미로워할 수 있을까?’


그 주 토요일에 K는 사 논문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연구실을 찾았다가, 지도교수와 선후배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의원에서 일하면서 마지못해 사논문을 마무리하려는 K와 달리 그들은 대학병원에 남아서 연구에 매진하고 다. 식사 자리에서 요즘 유망한 연구 방법에 대해서, 교류 중인 뛰어난 연구자들에 대해서 열띤 대화가 오갔다. K는 주로 듣는 입장이었다.

는 그 만남을 파한 뒤에 지친 느낌을 받아서, 안 그래도 늦어지고 있는 논문 작업을 하루 더 미루었다. 맥주 두 캔을 마시고 커다란 봉투에 든 감자칩을 먹으며 유튜브를 보다가 일찍 잠에 들었다.

일요일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속이 쓰리고 체중이 불어 있었다. K는 후회하며 어젯밤 자신이 왜 그랬을까 되짚어 보았다. 모임에서 아무도 그의 의견을 궁금해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그들이 흥미롭고 궁금했지만, 그들에게 자기가 전혀 흥미롭지 못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는 기운이 빠져버렸. K는 문득 J가 떠올랐다. 그녀를 좀 더 흥미롭게 바라보며 치료를 해나갈 수 있을까? 자신이 뒤처져 있고 세상에 별로 필요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의욕적으로 노력하면서 살 수 있는지 방법을 찾고 싶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똑같은 사람들이었어요. 무책임하고 충동적이고, 둘 다 자기 부모한테 절 맡기려고 했죠. 외할머니 집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전학 가서 그 뒤로는 할머니 집에서 살았어요. 부모님은 잘 와보지 않았고 할머니는 정말 무서운 분이었어요."

"어린 시절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군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뭘 하라고 시키잖아요. 그러면 다른 아이들은 열심히 하는데, 저는 그냥 멍하니 앉아 있었어요. 항상 힘이 없었던 거 같아요. 제가 밑바닥에 있다고 느꼈어요. 아이들이 같이 어울리고 싶은 친구들로 줄을 세운다면, 제일 끄트머리에 서 있는 아이가 바로 저 같았어요. 실제로 체육 시간에 편을 짜거나, 선생님이 앉고 싶은 사람과 앉으라고 하면 제일 마지막에 남는 게 저였어요. 그렇게 꼬랑지에서 제가 인생을 마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요, 중학교 때부터 뭔가 달라졌다는 걸 알았어요. 원래 별로 즐거운 게 없었는데, 엄마가 사다 줬던 새 옷을 입고 다닐 때 기분이 좀 좋아졌어요. 모르는 사람이 절 한 번 만나고 싶다고 친구한테 쪽지를 전해주는 일이 있었는데, 그날은 왠지 웃음이 많이 났어요. 중학교 3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이 저희 집이 힘든 걸 알고 저녁밥을 사주며 격려를 해주셨어요. 선생님 보기도 부끄러워서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해보니까 꽤 이해가 되고 기억이 나더라고요. 바보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 선생님 덕분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던 거 같아요.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 따랐어요. 아버지가 재혼했던 사람과 이혼하게 되면서, 자기 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했거든요. 아버지가 있는 부산에 가곤 했는 기차에서 어떤 남자 대학생이 저를 몇 번 봤다면서 말을 걸어왔어요. 그 사람이 입시 준비를 도와줬고, 대학에 합격하고부터 사귀게 됐죠. 그런데 아버지가 금방 또 만나는 여자가 생겼어요. 눈치가 보여서 더 이상 돈을 달라 할 수가 없어서 휴학을 했고, 결국 대학을 중퇴했지요. 아버지 집에서 하루빨리 나오고 싶어서 일찍 결혼하기를 택했던 것 같아요.

K가 가졌던 선입견보다 그녀는 더 지적이고, 자기 내면을 말로 잘 표현하는 여성이었다.

“남편 분과는 어떻게 해서 헤어졌나요?”

“남편이랑 나이 차이가 있고 구속받는 느낌이 들어서, 더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은 일만 하고  혼자 친정 없이 아이들을 키우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둘째가 세 살 때 크게 다투고, 그 사람한테 얻어맞고 나서 집을 나왔어요. 먹고살아야 하니까 백화점에서 옷을 판매하는 일을 시작했어요. 저는 아주 잘 팔았어요. 우수 직원으로 본사에서 상도 탔었지요. 일하면서 만난 사람과 재혼도 했고요. 그렇지만 오래가지 못했어요, 둘 다 재혼이었는데 그 사람한테 또 새로운 여자가 생겼거든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백화점을 그만뒀지요. 아무것도 안 하고 매일 술만 마시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보험 영업 일을 시작했어요. 그때 저한테 회원을 여럿 보내주고 퇴사한 사람 있었거든요. 고맙기도 하고 회원 관리도 해야 하니 그 사람과 가깝게 지내다가 기획 부동산이라는 데 걸려들었어요."

갑자기 J는 첫 만남에서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이제 저한테 희망이 없어요. 젊었으면 재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이제 다 늦었어요, 저는 늙었어요. 갱년기가 지난 지 한참 됐어요. 지금도 바닥이지만, 더 내려갈 것 밖에 안 보여요. 늙고 병들어서 입원하면 아무도 날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않지만요. 안 좋은 생각이 자꾸 들지만, 그건 또 용기가 없고 무서우니까,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뿐이에요. 죽을 날을 기다리면서.”


K는 약을 처방하면서 그녀가 치료 시간에 약간의 위안을 얻기를, 치료자와의 끈을 놓아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고립된 채 지냈다. 죽고 싶다는 충동을 겨우 참을 만한 정도, 딱 그 정도 기분 상태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약을 여러 번 바꿔보며 기다렸는데도 호전이 부족하자 K는 초조해져서 다른 어떤 시도라도 해보려고 했다.  

혹시 종교가 있으신가요?”

그는 절망 속에 있는 이들에게 종교, 봉사 같은 주제를 꺼내보는 게 때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초월적인 행위를 하면서 절망을 극복해 낸다.

“없다고 봐야겠죠. 요즘 저한테 연락하고 도와주려는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함께 교회 가자 그러거든요. 그런데 사람 많은 장소에 가는 것 자체가 힘들고 싫어요.”

K는 다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꿈에 대해 물었다. 자면서 어떤 꿈을 꾸는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꿈은 없는지. 그는 딱히 꿈에 의미가 있다고 믿지 않았지만, 매번 똑같이 지낸다는 말만 들으면서 면담을 마칠 수는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꿈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제가 죽는 꿈을 자주 꾸네요. 지난주에 꾼 꿈은 이랬어요. 유체이탈한 것처럼 빠져나와서 저를 봤어요. 죽었는데, 다시 몸속으로 들어갈 수 없나 방법을 애타게 찾았어요. 크게 꺽꺽 소리를 내면서 울었어요.”

현실에서는 죽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힘들었는데, 꿈속에서는 울면서 죽음을 아쉬워했군요.”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내가 너무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뒤로 J는 종종 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늘 비슷하게 혼자 지내고 잠을 많이 잤지만, 꿈은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을 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시험 보는 꿈을 꿨어요. 시험이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래서 앞에 앉은 아이 답안을 커닝하려고 했더니, 저랑 문제가 달랐어요.”

“그때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억울했어요. 왜 나만 어려운 건지."

K는 그 꿈이,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억울한 느낌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촛불이 나왔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그 촛불이 나 자신이라는 걸 알았어요.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위태위태하게 있다가 촛불이 꺼지면 죽는 거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다 결국 바람이 세게 불었고, 촛불은 넘어져서 바닥 잔디에 불이 번졌어요. 그리고 갑자기 꿈이 바뀌어서, 하얀 옷으로 전신을 두른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엎드려 있는 걸 봤어요. 저도 그중 하나였어요.”

“촛불이 꺼지지 않고 오히려 불이 더 크게 번졌군요.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요?”

“낮은 데로 임하소서. 그냥, 어디에서 주워들은 말인데, 그 말이 문득 떠올랐어요. 엎드려 있는 게 편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꿈은 의미심장하게 보였다. 바람은 그녀를 더 커지게 만들었고, 그녀는 자신을 낮추면서 편안함을 느꼈다. 겉으로는 여전히 무감동해 보일 뿐이었지만, 그녀의 깊숙한 마음에서부터 오는 메시지를 읽어보면 회복할 가망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점점, K는 그녀가 화장을 했음을 발견했고, 간혹 가다 미소 짓는 것을 보았고, 단순하던 옷차림에 스카프, 모자와 같은 것들이 더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기분 장애에 계절성이 있는 경우가 흔히 있으므로,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좋아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약을 복용하고, 누군가를 정기적으로 만나 말을 한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꿈을 이야기하는 것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된 일이든 그녀는 달라져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반응을 했다. 그전에는 좀처럼 엄두를 내지 못하던 일인데, 사람들이 청하는 대로 부활절 행사에 참석다. J는 아직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가슴이 답답했고 설교와 기도에 집중하기 어려워했지만 그때 받은 작은 책자를 소중히 가지고 왔다. 

“이 책에요,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삶은 더욱 가혹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영의 성장을 위해 고난을 계획한다.’ 이 말이 힘이 됐어요.

K는 종교에 냉소적인 사람이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이 생각이 그녀가 삶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의 우연하고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기 위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J는 주위 사람들의 추천을 받았다며 요양 보호사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가 성실히 교육에 참석하고 자격증을 따는 데 성공하자 K도 함께 기뻐했다. 실제로 요양 보호사 일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더욱 놀랍고 기뻤다. 왜 흔히 하듯이 수급자 자격을 유지하지 않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기에, 아마도 빚을 조금이라도 더 갚고 싶은 게 아닌가 짐작할 따름이었다. 그 뒤로 까탈스럽고 화를 잘 내는 노인을 돌보던 시기에 우울감을 호소하며 몇 번 빨리 찾아오기도 했지만, 대체로 잘 지냈다.

"예전에 저희가 했던 꿈 이야기가 기억나세요? 어려운 문제를 받았는데, 이렇게 잘 풀어내셨네요."

한 번은 K가 이런 말을 던져 보자, 그녀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저 그 꿈을 잊어버려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말에 별로 수긍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K는 진료를 마치고 집 근처에 있는 시립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논문 작업을 했다. 문을 닫는다는 방송이 나와서 집으로 걸어 돌아갈 때 그는 J를 떠올렸다. 그녀연상하기에는 자신의 어려움이 너무 소소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노력을 해보고 싶었다. 힘들지만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싶어져서, 치료를 통해 K가 오히려 그녀로부터 감화를 받았다고 느꼈다. 

치료했던 환자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J의 삶을 너무 미화하는 것은 아닐까?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부모가 연락해 왔길래 만났더니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낯설지 않은 이야기였고, 그의 진료실에서 울면서 이야기하던 이들이 J의 자녀일 수도 있었다.

그는 J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고 있으니까, 그녀가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이 특별히 더 어려운 문제였을 것임을 이해하고 싶었다. 만약 세상에 정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면, 어떤 사람의 타고난 기질, 자라난 환경을 모두 고려해서, 당신이 그에게 부과한 인생 난이도를 참작해서 점수를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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