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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 데이비드 소라 Apr 03. 2022

나는    분리배출 잘하는   내가 참 좋다.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나가서 분리배출했었지 

내가 나에게 맞는 사람을 사귀고 있는지 알아보는 척도 중 하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 변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드는 지를 보는 것이다. 나를 숨길 필요도, 포장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함께하는 시간과 서로의 존재에 큰 기쁨을 느낀다. 


나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며 화장하지 않는 민낯에 익숙해졌고 자연스러운 내 얼굴을 좋아하게 되었다. (화장을 잘 못하기도 하고...) 대화할 때마다 말미를 흐리던 습관도 고쳤다. 그와 함께 지낸 후로 어쩐 일인지 나는 내가 더 좋아졌다. 


지금의 짝꿍에게 느끼던 이 감정. 내가 더 좋아지는 감정을 오랜만에 느낀다. 웃길 수도 있는데, 이 낯설고 설레는 기분을 요즘 재활용 쓰레기 분리배출을 위해 바지런하게 움직일 때 느낀다.


물론 이상기후가 현실이 되면서 가지게 된 위기감과 위기가 올 거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체했던 지난날의 죄책감이 주요한 동기였다. 처음에는 의무감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쓰레기 박사로 유명한 홍수열 박사님의 유튜브를 보며 즉석밥 용기는 복합 플라스틱 재질로 재활용이 안 된다는 점, 우유갑은 종이류로 분류되지 않아 따로 분리배출해야 한다는 사실도 배웠다. 플라스틱도 강도와 환경 호르몬 방출 유무에 따라 HDPE, LDPE, PP, PS, OTHER 등으로 나누어진다. 겉으로는 다 같아 보이는 플라스틱이라도 종류별로 분류되어야 재활용이 된다는 점도 새롭게 배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아파트 분리배출함에는 그저 다 같은 플라스틱으로 다 같이 분류된다.)


여전히 배워야 할 것투성이다. 하지만 내용물을 다 먹은 용기 뒷면을 찬찬이 읽으며 배출법에 맞게 조치하는 내 모습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플라스틱 손잡이에 코팅이 다 벗겨진 냄비가 재활용이 될까 안될까 고민하다 밤늦게 재활용함에 도둑고양이 마냥 살금살금 가서 몰래 놓고 온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 안 되었다. 과거의 나는 그런 식이었다. 재활용이 될지 안 될지 알쏭달쏭할 땐 그 분류 감별의 책임을 경비 아저씨에게 전가했다. 검색 한 번이면 알 수 있는 것들인데.


더 이상 재활용 쓰레기를 버릴 때 죄책감을 가지거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이전에는 아파트에 베란다 형식의 외 부엌이 있는 이유는 보기 싫은 재활용 쓰레기를 시야에서 차단하기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재활용 쓰레기는 최대한 감추고, 최대한 모았다가 한 번에 신속하게 버리는 귀찮은 집안일에 불과했다. 그런 내가 용기를 씻고, 말리고, 분류하는 일에 애정을 느끼게 되었다니.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투명 페트병은 페트병대로, 코팅이 되지 않은 종이들은 종이류 함으로, 깨끗하게 씻긴 공병들은 공병 마대자루 안으로 숙소를 예약한 손님처럼 막힘 없이 제 자리를 찾는다. 예전에는 이렇게 버리면 안 된다는 막연한 생각에 불안해 왠지 모르게 두리번거렸지만 이제는 어떻게 분류하면 되는지 아니까 더 이상 쓰레기 분류장을 도망쳐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달라진 집안 풍경들. 주말 오후는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과 병들의 목욕 날이다. (물론 요즘에는 플라스틱 용기 배출 자체를 줄이려고 노력 중이다.) 정성 스레 씻긴 용기들을 탈탈 털어 볕이 잘 드는 싱크대에 널어놓으며 플라스틱 용기 사용을 더 줄여야겠다고 다짐하고,  그래도 이렇게 나온 용기들은 재활용이 잘 되어서 버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이렇게 달라진 내 모습이 참 좋은 걸 보니 이런 생활이 나랑 잘 맞는 것일지도. 요즘 들어 부쩍 어떻게 사는지가 그 사람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앞으로 어떤 내 모습을 더 발견하게 될까.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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