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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Dec 25. 2018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클리셰

종종 솔직하다는 포장으로 무례함을 일삼는 사람이 있다. 그녀도 그랬다. 늘 책상이 깨끗하고 가방 속에는 필요한 것들만 구획을 나눠 딱딱 자리하고 있었으며 칼 같은 일정 관리에 업무 처리도 확실했다. 인간관계 또한 어찌나 깔끔한지 나는 그녀의 군더더기 없는 일상이 부러웠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솔직하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상처를 받는 것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반면 나는 모든 것에 일희일비하는 인간. 책상이나 가방 속은 혼돈의 끝을 보여주고 있으며 업무 처리는 마감일이 눈앞에 닥쳐야 겨우겨우 마무리했고 인간관계도 깔끔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들과 복닥거리며 지내다가 상처받아 울고 있을 때면 그녀가 하는 말이 있었다.     


“사람은 아흔아홉 번 잘해주고 한 번 못해주잖아? 욕을 바가지로 먹어. 근데 아흔아홉 번 못해주다가 한 번 잘해주면 엄청 감동받아서 그다음부턴 나를 대하는 눈빛부터 달라진다니까.”     


그랬다. 나는 일희일비하면서 아흔아홉 번 잘해주고 한 번 못해줘서 욕을 먹는 사람. 그리고 아흔여덟 번 상처받은 다음 한 번의 호의에 감동해 그녀와의 관계를 십여 년 동안 유지해온 사람이기도 했다. 인간관계를 전략적으로 ‘관리’하는 그녀가 나에 대해 솔직한 말을 하는 날에는 속이 상해 며칠 동안 우울해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이 대신 화를 내주곤 했는데 나는 이렇게 말해서 그들의 속을 터지게 만들었다.

 

“알고 보면 좋은 애야. 겉으로는 까칠해 보여도 의외로 여리고 속도 깊은걸.”




지난 십여 년간 그렇게 ‘알고 보면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알고 보면 착한 사람,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 알고 보면 여린 사람 등 내가 관계를 지속해온 ‘알고 보면 좋은 사람’에 관해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들은 대체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고 조심성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나 자신이 우선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근 들어 나는 그런 유의 사람들을 정리 중이다. 타고나기를 수줍음을 잘 타고 내성적이라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욕먹는 것도 싫어해 모든 사람들에게 잘해주려고 쓸데없이 노력하는 편이지만 뭐랄까. 나는 이제서야 겨우 내가 좀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소중하면 다른 사람도 소중한 법이다.


무엇보다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 걸 ‘알아내기 위해’ 애를 쓰기엔 이제 나는 체력도 시간도 없다. 그리고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일리 없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 예쁨 받고자 노력하는 일 같은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모두에게 사랑받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면 낯부끄러움에 몸서리가 쳐진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는 관계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고 싶은 사람을 더 실컷 좋아할 수 있도록 그 외의 관계는 정리하는 게 인간관계에 덜 스트레스 받는 지름길인 것 같다.

    

싫은 사람은 싫어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기. 친절을 베풀 땐 돌려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기.

내가 정한 간단하고도 소심한 규칙이다.      


그리고 아흔아홉 번째 솔직한 척 무례했던 그녀에게 이별을 고할 생각이다. 지금쯤 그는 어디선가 '다음번에는 한 번 잘해줘야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은 필요 없다. (물론 이렇게 똑똑한 척, 단호한 척 말하고 있지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으악!)


아아 내일도 나는 여전히 일희일비하며 아흔아홉 번 잘해주고 있겠지. 그렇지만 나는 한 번을 실수하더라도 아흔아홉 번 잘해주는 다정한 사람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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