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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Dec 30. 2018

고독한 대식가의 식탁

완벽하기에 우리의 점심시간은 너무 짧다

나에게 고역인 것들이 꽤 있는데 그중 몇 가지를 골라보자면 다리가 많은 벌레, 삶은 가지와 당근 그리고 점심시간이다. 그나마 삶은 당근은 최근에 이르러서야 겨우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학생일 때에는 ‘누구랑 점심을 먹느냐’가 안정적인 학교생활의 관건이었다. 3월 2일 새 학기가 되면 처음 보는 친구들과 통성명을 하고 누구와 점심을 먹을지 주변을 살피는 초대형 눈치 싸움이 시작된다. 이 눈치 싸움에 어쩔 수 없이 참전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싫었던 나는 매년 3월이 될 때마다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렇지만 다행이랄까. 나처럼 3월 증후군에 시달리는 친구 하나를 만나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 되어 점심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 친구와 함께 심지어 수능 보는 날까지도 점심식사를 맛있고 배부르게 즐겼다. 수능 끝난 날 저녁,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비운 도시락을 보며 엄마가 기가 차서 웃었다. (그렇게 나는 훗날 재수를 하게 되는데……)




“그러나 훌륭한 만찬은 훌륭한 대화를 이어가는데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지요. 사람은 잘 먹지 않으면 제대로 생각할 수 없고, 제대로 사랑할 수 없으며, 제대로 잠을 잘 수도 없습니다.” _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훌륭한 만찬의 조건은 훌륭한 대화라 하였다(아마 그는 훌륭한 대화에 방점을 둔 것 같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로 함께하는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식사의 수준이 달라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낯가림이 심해지고 있는 나는 불편한 사람과 밥을 먹게 되면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음식이어도 마분지를 씹는 기분이 들었고 말수도 극도로 적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 졸업 후 입사하게 된 첫 직장에서의 첫 점심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흰색 블라우스에 분홍색 H라인 치마를 입고 간 첫날 과장님이 합정역 인근의 중국집에 데려갔다. 신입을 앉혀두고 아무 말 없이 핸드폰 게임만 해대는 과장님 앞에서 ‘내가 먼저 뭘 물어봐야 하나,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혹여 흰색 블라우스에 짜장면이 튀지는 않을지 조심스레 젓가락질 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직장 상사와 점심을 함께하는 것만으로 하루 정량의 에너지를 다 쓴 것 같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여 사무실에 돌아오니 옆자리 동료가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뻘줌했죠?”라고 속삭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야 발견한 흰색 블라우스에는 짜장면 한 방울이 속이 더부룩한 채 오후를 버티던 신입의 각개 전투 흔적처럼 앉아 있었다.


이제는 말 없이 자신을 대우해주기만을 바라는 상사는 가뿐히 무시하고, 어리바리 어쩔 줄 몰라 하는 신입에게는 “뻘쭘하죠?” 말을 건네며 카페에 데리고 가는 여유도 생겼다.

불편한 사람과의 불편한 점심시간은 최대한 피한다. 나의 몇 안 되는 사회생활 지침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직장생활에서 훌륭한 대화가 있는 훌륭한 만찬은 판타지 같은 것이다. 그저 한 가지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점심시간이 30분 정도 더 주어졌으면 좋겠다. 식당까지 가려면 이쪽 건물에서 저쪽 건물 끝까지 이동해야 하고, 점심시간 엘리베이터는 만원이라 몇 번이고 그냥 보내야 하는 경우를 고려하면 1시간은 너무 짧다. 미식가라기보다는 대식가에 가까운 나는 시간에 쫓겨 울며 겨자 먹기로 밥을 남기기 일쑤인데다가 음식이 그다지 맛있는 것도 아니다. 대식가에게 대한민국 점심시간은 고통이다. 급하게 먹어서 늘 탈이 난다.




양이 적어도 맛있는 음식보다 적당한 맛의 음식을 푸짐하게 먹는 걸 더 좋아하는 나는 주말에 종종 기사식당에 간다. 혼자서도 씩씩하게, 맛있게 식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여 기사식당을 좋아한다. 게다가 맛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혼밥에는 젬병이다. 전 세계 대식가들이 나를 향해 “그렇다면 넌 대식가라고 할 수 없어!”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며칠 전 자양동의 유명한 기사식당인 송림식당에 갔었다. 칠이 다 벗겨진 손잡이가 달린 프라이팬에 나오는 돼지불백과 푸짐한 상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봉밥은 감동이다. 결국 반주까지 걸쳤다. 역시! 낯선 지역에서 어디 갈지 고민될 땐 무조건 기사식당에 가야 한다는 나의 지론은 실패한 적이 없다.


보는 사람마저 행복하게 만드는 고로상의 식사 시간


돼지불백에 밥을 푹 덜어 고추장을 넣고 달달 볶아 먹으면서 다짐했다. 내년에는 고독한 미식가의 이노가시라 고로상처럼 혼자서도 아름다운 점심 식사를 해야겠다고.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조금 뜬금없는 목표 같긴 하다.

 

* 그건 그렇고 다들 자양동에 있는 송림식당에 꼭 한 번씩은 갔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건 다 같이 즐겨야지요! 계산하고 나올 때는 주인장 할머니가 야구르트도 준다고요. 완벽한 식사의 마무리는 역시 야구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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