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스위치를 켭니다
갈등이 발생하는 순간은 아무리 반복해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날 때면 늘 당황하며 우왕좌왕하기 일쑤인 나는 갈등에 무척 취약하다. 일단 불화가 생기면 목소리가 떨리고 눈물부터 난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싸웠을 때 울면서 화를 내는 건 그나마 낫다. 이게 회사에서일 경우에는 아주 난감하다. 상사에게 불합리한 처우에 대해 따졌던 회의실에서, 다른 팀 동료와 협업하던 과정에서, 내 자리의 전화기를 붙들고 상대방에게 목소리를 높이다가, 나는 자주 화를 내며 울곤 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또 다시 화가 나면서 울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주 지독한 더위가 전국을 들썩이던 해의 여름, 새로이 맡게 된 업무로 한창 고역을 치르고 있었다. 사진가를 섭외하고 의상 협찬은 물론이며 모델의 헤어나 메이크업뿐만 아니라 필요한 소품, 촬영 장소, 일정 조율 등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조언을 구할 사수도 없어서 하루에 세 번씩 “어떡하지, 어떡하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유난을 떨었다. 게다가 3주 안에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혔던 것은 제작비 절감. “조금만 더 깎아주실 순 없나요?”라는 질문은 단골 멘트였다.
그냥 다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든 해내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마감일이 코앞에 성큼 다가왔다.
하지만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정해둔 기한보다 2주나 작업이 늦어지게 된 탓이다. 회사에서는 일정을 맞추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며 내년을 기약하자고 했다. 사진가, 저자, 디자이너가 시간에 쫓기며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다. ‘결과물을 기다리던 관계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나를 붙잡고 상사가 한 시간 넘도록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동안의 노력과 고생은 잘 알고 있지만 회사는 매출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말은 충분히 이해했지만 마지막으로 던진 한 마디가 분노 스위치를 켰다.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여럿의 관계자가 개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한 개인의 노력과 정당한 주장을 무마시키는 말. 좋은 게 좋은 거지.
화를 내면 꼭 곁에 있던 누군가가 위로한답시고 무심하게 내뱉던 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는 게 어때?
‘좋은 게 좋은 거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마치 나 혼자만 참으면 모든 것이 순조로울 거라는 뜻을 상대방에게 은밀하게 비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약육강식의 먹잇감이 된 기분이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이야기는 약자들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법칙 같았다. 그건 만만한 사람한테만 주어지는 테두리 같은 게 아닐까?
“앞으로는 방문객이 오면 막내가 커피를 타는 게 좋겠지?”
팀장이 뜬금없이 회사 메신저로 말을 걸어왔다. (사실 이건 답이 정해진 질문이다. 막내가 타라는 통보와 다름없다.) “막내가 두 명인데 그럼 격주로 맡아서 하면 되겠네요?”라고 되물었더니 당혹스러운 답변이 이어졌다. “한 놈은 남자잖아. 커피는 여자가 타야지. 아, 오해할까 싶어서 하는 말인데. 남자가 커피 타서 오잖아?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부담스러워 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여자애가 커피 전담하는 걸로 하자”라고. 막내라는 이유로 잔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것도 맘에 안 드는데 하다못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남녀를 가르는 수준까지. 다시 한 번 분노 스위치에 번쩍,하고 불이 들어왔다.
연차가 쌓이면 울면서 화를 내는 쓸모없는 버릇 같은 건 자연스레 사라질 줄 알았는데 웬걸,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화를 낸다. 아무리 대등한 관계라 할지라도 울기 시작하면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하물며 팀장에게 부당함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요구하는 자리에서까지 울 수는 없었다. 메신저는 안 되겠다 싶어 얼굴을 마주하고 나의 의견을 이야기했다. 눈물을 참는 대신 목소리가 달달 떨렸으나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운 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회 초년생 때의 나는 만만해서 좋은 게 좋은 거란 후려치기에 어물어물 넘어갔지만 이제는 못 들은 척 못 본 척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의 대물림은 없다. 짬밥의 힘은 이런 데에 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지만, 그 좋은 건 너한테나 좋은 거지. 좋게 좋게 넘어가면 언젠간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결국 탈이 난다.
결국 막내는 커피를 타지 않게 되었다.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는 자신이 직접 커피를 탄다. 회사에 새로 생긴 규칙이다. 좋게 좋게 넘어가지 않았더니 좋은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역시, 만만한 사람에서 탈피하는 첫 번째는 ‘좋은 게 좋은 거지는 없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