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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Jan 04. 2019

순간을 믿어요

나와 내 친구들이 반드시 지키는 연애 철칙이 하나 있다. 자수성가한 남자는 절대 만나지 말 것. 그런 남자는 대개 고집이 세고 자신의 생각만 늘 옳으며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자신의 성공담에 취해 사는 사람은 매력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친구들도 한 가지 간과하는 점이 있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다들 믿을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콧방귀를 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 또한 자수성가한 사람인 걸!




열 살때쯤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2년 동안 나는 쭉 혼자 다녔다. 천성이 사람을 잘 믿지 않는데다 고집 세고 예민했던 탓에 웬만해선 친구를 잘 사귀지 않았다. 친구 같은 거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효원이를 만났다.


“이거 같이 먹을래?”


동그란 눈, 새까만 눈썹, 이제 막 자라나는 곱슬머리로 이마 끝이 복실거리던 똑단발의 소녀가 초코우유를 건네며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그 말 한 마디의 순간 때문에 효원이는 내게 모든 이유가 되어 주었다. 학교에 가야 하는 이유, 이번에 새로 산 연필이 얼마나 예쁜지 열심히 설명하게 되는 이유, 화장실 같은 칸에 들어가 서로의 곁을 지켜주는 이유 등. 이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흑백색이던 학교생활에 갑자기 오색찬란한 빛이 찾아들었다. 친구란 그런 것이었다. 내게 친구는 오직 효원이뿐이었다. 그녀가 나였고 내가 그녀였으니까. 다른 사람은 필요없었다. 알고 보니 나는 그런 아이였던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에 모든 걸 내어줄 줄도 아는 사람.


그렇게 나는 전교에 친구가 딱 한 명뿐이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한 초딩이 되었다. 하지만 그 초딩의 열 살 인생에 가장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나 전학 가게 됐어. 너를 만나려면 버스도 몇 번씩 타야 하고 지하철도 몇 번씩 타야 하는 그런 먼 곳이래.”


“안 가면 안 돼? 나 너무 슬퍼.”


가장 친했던 친구 효원이가 저 멀리 전학을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내 하루하루에 가위질을 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곤 했다. 시간을 자르고 잘라 효원이가 없는 이 시절이 고통 없이 지나가길 바랐다. 효원 없는 열 살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는 걸! 하고 자주 소리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는 떠나고 겨울방학도 끝이 났다.


마치 한 계절의 성장통을 겪은 것처럼 그 뒤로 성격이 180도 바뀌어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천방지축 장난꾸러기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바로 자수성가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인가. 찰나의 순간이 내게 준 친구라는 선물을. 이보다 더한 성공담이 있을 수 있을까.




나의 첫 연애는 다른 애들에 비해 좀 늦은 편이었다.

오후 햇볕에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사람은 세 번의 꽃 피는 시절이 온다는 말이 있어. 딱히 좋은 화장품을 쓰지도, 좋은 걸 먹지도 않는데 피부가 옥처럼 곱고 빛이 나. 그 시기에 보통 연애를 하지”라며 본인의 연애담을 털어놓던 교수님 말을 너무 철썩같이 믿어서였을까. 정말 너무 아주 매우 이상하리만치 여러 명에게서 고백을 받는 4학년 대학 졸업반 학기였다. 시간이 넘쳐나던 1학년 때 고백 좀 해주면 얼마나 좋아. 취업을 목전에 두고 ‘연애 는 사치일 뿐인데!’ 울부짖으며 세 명의 남자와 데이트를 했다.


“다음에는 원피스 입고 나오면 진짜 예쁠 것 같아!”

첫 번째 남자. 같은 학교 경제경영학과 대학원생이었는데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나온 나를 보며 설렘 가득한 눈빛으로 건넨 첫 마디 때문에 내 마음은 짜게 식어버리고야 말았다.


두 번째 남자는 캐나다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그 남자가 내게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한국 유치원에서 영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는 그가 데이트하러 나와서 하는 질문이 '웨어아유프롬'이다. 캐나다 사람들의 조크인 걸까, 아니면 나를 놀리려는 걸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질문의 의도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말이 통해야 말이지 나원참. 영어 열심히 공부할 걸



세 번째 남자는 말 한 번 제대로 섞어보지 않았던 같은 과 선배였다. 꽤 맛있다면서 종로 후미진 골목의 꼼장어집에 데려가 계란찜 후후 불어가며 격식 차리지 않고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난생처음 먹는 꼼장어에 반해 그날 내가 먼저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알았다. 연애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교수님이 말하던 꽃 피는 시절이란 게 이거다! 라는 사실을. 그토록 짧은 순간이 주는 확신이 있었다.


나의 연애 소식을 들은 동기 한 명은 ‘일 년 안에 헤어진다’에 돈을 걸었지만 우리는 어느새 8년차 연인이 되었다.


아직도 몇몇은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말한다. 나 또한 동의한다. 영원이란 게 이 세상에 있을까. 연애의 유효기간은 유독 짧기도하고.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 주는 확신 하나로 8년간 연애를 이어오면서 드는 생각은 단 하나다.


“순간의 유효기간은 아무래도 신의 영역 같다. 그래서 순간을 믿는다.”


오늘도 나는 영원이 아닌 순간에, 마음을 건다.

효원이 같은 친구도, 8년차 애인도, 순간에 마음을 걸었기에 우리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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