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드롱 May 15. 2022

나는 잘 넘어지는 아이였다.

몸뚱이라는 옷에 대해

나는 잘 넘어지는 아이였다.

무리 지어 다니며 소속감의 즐거움을 느끼지도 않았고, 대장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오히려 유치하게 여겼다. 동네에 또래 친구들이 없어서였을까? 나는 고무줄과 공기놀이를 익힐 기회를 갖지 못했다. 뒤늦게 이게 소녀들의 중요한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몇 번은 끼어보려고 했지만 리듬에 맞춰 날렵한 새처럼 깡충거리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다. 번번이 줄에 걸려 흥을 깼고 따라서 내내 줄만 붙잡고서 아이들의 날렵한 발놀림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또래의 애들이 제 키보다 훌쩍 높은 고무줄을 손으로 휙 잡아끌어 종아리로 걸고 발목에 걸치고 뛰어넘으며 노래하는 기예의 수준은 거의 신들린 것 같았다. 이미 내가 따라잡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고무줄과 공기놀이뿐 아니라 나는 몸으로 하는 모든 것에 늦었다. 늦기만 하면 다행인데 가만히 걷다가도 잘 넘어지는 타입이었다. 공상을 하며 걷다가 낮은 턱에도 자빠지는 일이 하도 많아서 무릎이 성할 틈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들의 명랑한 세계를 포기하고 홀로 다른 세계를 여행하는 즐거움을 택했다.

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끝도 없는 시공을 넘나드는 마법의 세계였다. 달리기를 못해도, 부모의 허락이 없어도, 나이가 어리거나 돈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책장만 넘기면 무한히 다채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내 운동능력과는 상관없이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은 점점 더 부풀었다. 그 차이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로 더 벌어졌을 거다. 다행히 고학년이 되고부터는 더 이상 고무줄 곡예 능력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책을 많이 읽어 성적이 올랐고 마음껏 친구도 사귀었다. 나는 쿨해지고 싶었다. 소위 인기 있는 애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점차 내 신체는 믿지 못하게 되었다.

중학생이 되고 젖가슴이 커지고 첫 생리를 하자 몸이라는 것이 더욱더 거추장스러워졌다. 존재 이유가 납득되지 않은 상태로 성장한 몸뚱이는 귀찮기만 했다.


오늘 거울을 보니 잘 모르는 웬 여자가 있다. 

불신과 당혹이 섞인 눈빛. 마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낯선 얼굴.

내 몸과 얼굴은 언제나 관심을 받지 못한 채로 뒤쳐져 나를 따라왔다. 목욕탕에서 때를 밀 때나 손가락이라도 베여 아플 때나 비로소 이 몸뚱이는 대체 왜 여기에 있을까, 새삼스럽다.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은 갇힌 몸 안에서 눈이라는 창문으로 내다보는 것과 비슷하다. 내 피부는 내가 사는 집의 벽돌과 같은 것인데 아무리 만져보아도 이게 진짜 나일까 의심스럽다.

 

심리서마다 진리처럼 새겨진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주문은 나에게 어려운 시험 문제같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것 일까? 나라는 존재는 뭘까? 사랑은 또 뭘까? 스스로에게 질문할 때마다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밉진 않지만 그렇다고 애틋하지도 않다.

가끔, 거울을 보며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나”에 진심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내 몸뚱이에 갇힌 느낌은 여전하다. 아니 갇혔다고 말하기엔  편안하게 머무른다는 느낌이다.

대신 창문 너머를 보느라 바쁘다, 그래서 걸핏하면 넘어질지언정 큰 병 없이 나를 담아준 수더분한 몸이 고맙다. 나는 아직 건강한 시력으로 많은 아름다움을 본다.

어둡고 괴롭고 못난 어떤 것들에도 귀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다.

종종 돌멩이도 보도블록도 거친 나무껍질도, 공중을 나는 쓰레기 봉지도 뭉클하다.







깊이 잠든 일곱 살 아들의 손을 만져본다. 아들의 피부는 나를 닮았다. 하얗고 여리기보다는 가뭇하고 단단하다. 내 피부를 쓸었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 타인의 몸에서 발견된다.


다만 이 녀석은 자신을 몹시 사랑하고 있다. 틈만 나면 거울을 보며 최고! 를 외치곤 한다. 스스로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뛰고 구르고 비틀면서 자신의 몸을 마음껏 즐거워한다.

나는 아이의 사랑받는 몸을 쓸어본다.

내 것 아닌 내 살이 몹시 사랑스럽다.

그건 진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