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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드롱 Sep 05. 2023

눈치 없는 것도 죄다.

순수한거야 눈치가 없는 거야?

인간 사회의 구성원으로 무난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술로 ‘눈치’라는 것이 있다. 부가적인 요령으로만 생각되던 이 ‘눈치’가 성공적인 사회화의 중요한 덕목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 수록 깨닫는다. 직장에서는 물론이요, 친구나 부모 자식 간, 부부 사이에도 적용된다. 돈이나 권력이나 기술이 없어도 눈치만 빨라도 중간은 간다. 반면 ‘눈치’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민폐’를 끼치기 쉬워진다.


정색을 하고 꾸짖거나 당당하게 분노를 표현할 수 있는 커다란 민폐의 경우는 그나마 깨끗하게 사과를 하거나 관계를 끊는 등 처리가 간결하지만, 보통 피해가 소소하고 순간적이고 미세한 경우가 더 많다. 대부분 이런 경우는 한쪽이 참고 참고 더 참다가는 울화병이 날 것 같아서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당한 쪽이 폼이 나지 않는다. 사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것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랬고 하는 식으로 말하다 보면 스스로 더욱 옹졸하고 구차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눈치 없는 인간은 주변에서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인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눈치가 없으므로 자기가 어느 정도로 심하게 욕을 먹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그래서 행동 교정이 어렵고 그러다 보니 ‘마이웨이’의 스타일이 생긴다.

이 스타일이라는 것은 본인이 아닌 주변에서 만들어주는 일종의 너그러움이다. 악당보다는 뭐랄까 얄미운데 버릴 순 없는 캐릭터.

이들은 가족이고 상사고 친구다, 그래서 내버릴 수 없는 관계일 때가 많으므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니까. 그래도 얄밉다. 그래서  ‘에휴. 걔는 원래 그래’라는 암묵적 협의가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일면 자신감 넘치는 사람, 자기 세계가 확고한 사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지긴 해도 이들은 나름대로 잘 살아간다.

어쩌면 더 행복해 보인다.




사실 평생 눈치 보고 살아야 하는 삶은 얼마나 피곤한가? 한국과 일본사람들이 특히 눈치를 많이 본다는 말이있다. 사실인듯 하다.

그래서 일부러 특정 눈치가 없는 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보통 그들은 천진하고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일정량 보존의 법칙으로 존재하는 이 ‘눈치’가 특별히 없는 자들은 그 이웃들이 아량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 이들을 두고 험담을 해봐야 잠깐 후련할지는 몰라도 어차피 큰 개선은 어려우니까. 들통나면 괜히 상처를 주고 원망만 살뿐이다.


눈치란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한다.

눈치란, 순간순간 타인의 시선이나 돌아가는 상황, 태도에서 비 언어적 메시지를 포착한 후 상황에 맞게 재빨리 태새전환을 하는 생존기술이다. 그래서 대략의 규칙을 외울 수는 있어도 후천적으로 그 감각을 발달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는 여태 어릴 때 눈치가 ‘꽝’이었던 인간이 ‘빠삭’ 해지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만약에 본다면 조금 슬퍼지겠지. 사람을 얼마나 닦달을 했으면 이렇게 변했을까. 그가 사회화(?)되기까지 받았을 수많은 상처와 충격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나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으로서 가능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나도 적지 않은 폐를 끼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일단은 인간으로서 지구에 끼치는 환경적 원죄는 차치하더라도, 누군가 내 뒤에서 눈살을 찌푸리며 “정말 민폐야. 어쩌면 그걸 모를까?”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면 좀 오싹하다.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문득, 어느새인가 연락이 끊긴 지인이나 묘한 뒷맛을 남겼던 만남 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 내가 그때 눈치가 없었나?라는 각성이 찾아오기도 한다. 역시 나도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두어야겠다.


대신 민폐보다는 ‘신세 지다’라는 말을 쓰고 싶다. 이는 사전적으로는 주변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는 의미로 민폐와 같은 말이지만 조금 더 부드럽게 들린다. 신세는 질 수도 있지만 갚을 수도  있으니까.  

누군가 나에게, 이봐. 너도 주변인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어.라고 하면 왠지 기분이 나쁘지만, 너도 주변인에게 ‘신세’지고 있잖아.라고 하면 맞아. 그렇지.라고 왠지 바로 인정할 것 같다.

비록 지금은 그렇지만 형편만 좋아지면 다 갚겠습니다 라는 말도 할 수 있다.

어차피 사람은 모두가 서로에게 신세를 지는 사이 아닌가?

그런 사람들은 또 왠지 미워할 수 없는 순수한 캐릭터이잖아.라고 갑자기 두둔하고 싶어지네.


그리고 나로 인해 크고 작은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드리고 싶다.


용서를 생각하니 갑자기 일본 드라마나 뉴스에 곧잘 나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정장을 입고 침통한 표정으로 지나치다 싶을 만큼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사람.

그는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고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곧 자결할 것처럼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지간한 일 정도는 스르르 화가 풀릴 것 같다. 뭐 그렇게까지… 일어나세요.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그에 비해, 아니,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고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지만 당신이 기분 나쁘게 느꼈다면 미안해요 와 같은 구구절절 복잡한 조건부 사과는 상대방을 더욱 기분 나쁘게 한다.

일본은 그걸 전 국민이 아는 것 같다. 잘못의 경중을 떠나 기왕 사과를 하려면 그런 화끈한 태도가 좋아 보인다. 그렇게 하면 나도 사람들이 좀 너그럽게 봐주려나?


“제가 미련하게 눈치가 없어,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연을 끊지만 않아주신다면, 이 신세를 언젠가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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