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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드롱 May 04. 2022

엄마는 어디 다녀?

여기저기 다닌다, 왜.

초등학교에 들어간 지 한 달쯤 된 어느 날, 8살의 아들이 나에게 물었다.

콘플레이크를 떠먹고 있었던가, 밥을 먹고 있었던가. 아이는 입안의 음식을 밀어넣으며 툭, 질문을 던졌다.


엄마! 아빠는 회사가잖아. 그런데 엄마는 어디 다녀?

나는 아차,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엄마는 어떤 일을 해? 엄마의 직업은 뭐야?라고 내 아이가 장차 내게 묻게 된다면 나는 그때 쯤 반드시 할 말이 있을 줄 알았다. 아니 반드시 확실한 대답을 하고 싶다고, 꼭 해야만 한다고 다짐했었다.

그때는 아마 아이가 3학년 쯤 될 즈음일거라고도 나 혼자 예상했는데. 낭패다. 너무 빠르다.


엄마는…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도 예전엔 회사를 다녔는데… 라고 우선 말을 꺼낸 다음 흐렸다.

아, 그런데 쫒겨났어?

라고 아들은 말하며 입안의 콘플레이크인가 밥알인가를 씹었다.

아, 아니 하하하. 나는 과장되게 웃었다.


음…엄마는, 미대를 나와서…

미대는 대단한 거지? 아들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는 아들의 눈망울을 배신할 수 없어서 대답했다.

응. 미대는 그림을 아주 잘 그려야 갈 수 있는 학교야… 그래서… 엄마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그러는 게 일이야…


<일? 돈을 벌어야 일이지.> 라고 내 안의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아…그렇구나. 아들은 별 감흥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왠지 초조해져서 말했다.

음…너 동화 좋아하지? 그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을 작가라고 해.

엄마는 일종의…작가야.


<작가는 무슨. 거짓말도 잘 하네. 네가 동화작가야? 소설가야? 등단을 하길 했어? 글조차 꾸준하게 쓰지도 않으면서.>라고 내 안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받아쳤다.

<그림은 또 뭘 얼마나 그리는데? 진지한 화가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냐? 그렇다고 네가 뭐, 전문 일러스트레이터야? 흉내만 내면서.>


내 안의 화가 난 듯한 목소리와 싸우는 것이 급한 게 아니었다. 침묵이나 설명이 수상쩍게 길어지면 안된다. 나는 8살이 납득할 만 한 적당한 직업을 바삐 떠올렸다. ‘주부’ 혹은 ‘엄마’ 를 제외한 그럴싸한 직업을. 그러나 나를 규정할 다른 사회적 직업의 이름이 떠오를 리 없었다. 당연하다. 나는 현재 가끔 들어오는 아르바이트 말고는 수입이 없으니까. 돈을 못버는 일은 취미지 직업이 아니다.


내 안의 목소리는 빈정거림으로 바뀌었다.

<왜 엄마라고 말을 못하냐? 내 직업은 주부야. 라고 왜 말을 못해? 뭐야, 주부라는 이름이 창피해? 아니면 차라리 백수라고 솔직히 말하든가.>


자신의 단순한 질문이 왠지 엄마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을 느꼈던 것일까, 아니면 대충 둘러댄 대답을 받아들인 것일까. 다행히 아들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들은 계속해서 밥인지 콘플레이크인지를 열심히 숟가락으로 퍼 먹었다.


나는 돌아서서 내 안의 목소리에 대고 그제야 변명을 했다.

그래. 난 내 직업이 ‘엄마’라고 대답하기 진짜 싫었어. 물론 나는 ‘엄마’지만, 엄마는 직업이 아니잖아.

당당하게 주부라고 하기도 싫었어. ‘주부’다운 ‘요리, 청소,살림같은 업무에는 재능이나 자부심을 못 느낀단 말야. 주부를 비하하는 게 아니야… 다만 최소한 내 아들에게 ‘주부로만’ 각인되는 게 싫었어. 나는 다른 많은 ‘가능성’을 가졌던 사람이었잖아. 난 아직, 끝난게 아니잖아. 난 사실 더 ‘멋들어진’. ‘그럴듯한’ 엄마이고 싶었단 말이야. 정말 간.절.하.게…

나는 코너에 몰린 권투선수처럼 참담했다. 내 얼굴은 저절로 울고 있었다.


간 수치가 높으니 추적검사를 받아보라는 건강검진 결과지, 여러 번 삐끗해서 인대가 끊어져버린 발목, 땅을 디딜 때 마다 느껴지는 족저근막염의 통증.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상태로 불어나버린 몸무게, 피로감. 요즘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받는 벌 같았다. 이 형벌은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도 매일 아침 주어지는 자신감이나 희망, 의욕 같은 것들을 착착 끌어내릴 만큼 무겁고 확실했다.

신체가 주는 고통과 더불어 아직도 나만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초조한 불안감은 매일 커진다. 너 자신을 찾으라는 내 안의 목소리는 이제 차갑고 혹독하게 변했다.

건강하게 학교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1학년짜리 아들을 보는 싱그러운 기쁨과는 별개로 나는 감옥에 갇힌 죄수나 다름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아침 9시부터 낮 1시까지 주어지는 하루 중 가장 빛나는 시간(애가 학교에 가 있는 시간)은 비루한 의욕을 끌어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숙제를 못한 아이나 빚을 못갚은 채무자처럼 불안감에 쩔쩔매고 있다. 그 숙제를 낸 사람, 빚쟁이는 나인데 말이다.


물론 알고는 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법은.

고리를 자세히 살펴보고 무언가 하나 끊어내면 된다.


아들에게 그럴싸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든지

체중을 줄이든지

죽이되든 밥이되든 꾸준히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지.

우울증일지도 모르니까 약을 먹든지.


알고는 있으나 뭐 하나 쉽지 않다.


그래도 제일 쉬운 것은 글자로 하나씩 쓰는거다. 보이지 않는 무거운 공기를 보이는 단어로, 문장으로 하나씩 꺼내 늘어놓는다.

그게 지금 내게 우울증 약만큼 효과가 있다.


그래서 쓴다. 할 수 없이 쓴다. 견딜 수 없어서 쓴다.

밥을 우겨 넣듯이, 약을 씹어 삼키듯이, 쓴다.


그리고

적어도 네가 3학년이 될 때 까지는 내가 뭐라도 하고 있을거야. 라고 혼자 되뇐다.


오늘따라 입안이 더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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