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사진 언덕이 있다.
여느 집처럼, 나도 친정에 가면 앨범들이 있다.
사진이 취미인 아빠 덕에 우리 가족의 70년대~90년대까지의 순간들이 거기 상당히 촘촘하게 기록되어 있다. 다른 집에는 아마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을 텐데. 우리 집 앨범들은 펼치면 수십 년 된 사진들이 낱장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어린 마음에도 왜 엄마는 사진들을 정리하지 않나? 궁금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정리할 생각 또한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것도 익숙해졌다. 그 시절이 궁금해 앨범을 열어보면 여전히 낱장들로 쌓여있다. 그래도 대략 시간 순으로 뭉쳐져 있긴 해서 또 아주 불편하지는 않다. 남들이 우리 집 앨범 상황을 본다면 아마 깜짝 놀라겠지.
아빠가 생산하는 사진들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앨범이 모자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중에라도 정리할 생각을 왜 아무도 하지 않았을까?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미뤄둔 건가.
우리가 다 못 말리는 게으름뱅이들이라 그런가.
앨범 속 가족들의 얼굴은 풋사과 같다. 모두들 지금보다 팽팽하고 풋풋하다. 카메라 렌즈 앞에서 약간 어색한 표정마저 나름 재미있다. 우리가 불편하거나 말거나 이건 아빠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인 거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나는 아빠가 카메라를 들이댈 때마다 부담스러웠다. 주문도 까다롭고 친절하지도 않았다. 윽박지를 때도 있었다. 여기 서 봐. 아니~ 이쪽으로. 한번 더. 아니 이쪽이라니까?
사진은 언제 보느냐에 따라서도 다른가보다. 그때는 싫었는데 이제와 보니 아빠의 마음도 보인다. 요새는 나도 거부하는 아들을 붙들고 억지로 사진을 찍고 있으니까 뭐. 할 말 없다.
가족 중 누군가 앨범을 펼치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와 나 참 못생겼었다. 아 이때 옆집 할머니가 너를 참 이뻐했는데. 이때 너는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었지. 이 곰인형은 어디로 갔을까. 할머니가 참 젊으셨네. 엄마가 지금 나보다 어려. 예쁘다. 그립다. 어느새 모두들 옹송그리고 앉아 사진 뭉치들을 뒤적인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기억들의 농도는 짙어 빠져나오기 어렵다.
눈앞에 이미지들이 범람한다. 쇼츠나 유튜브 영상, 핀터레스트, 클릭만 하면 착착 다른 주제로 변하는 웹사이트, 화려하고 신기한 비주얼의 바다를 정처 없이 항해하다 보면 멀미가 난다. 아 이거다 싶은 게 조금 전 있었는데. 기억하고 싶어도 다 기억할 수 없다. 폰사진은 결국 외장하드의 폴더 속 폴더로 묻힌다. 많은 것을 보는데도 헛헛하다. 나는 스크랩 버튼을 누르고, 공유 버튼을 누른다. 하트를 누른다. 간직하지 않는다.
간직하지 않는다.
간직할 수 없다.
부쩍 기억력이 나빠졌다.
아들의 볼록한 이마, 통통한 볼, 무언가에 집중하는 동안 살짝 튀어나오는 입술. 사소하고도 내밀한 나만의 장면들은 내가 나중에 죽을 때 꺼내보고 싶다. 그러나 내 기억력 수준은 어제 뭘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장에 새기고 싶은 순간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나는 그걸 스크랩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정리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사진들만 보면 이야기가 떠오르는 바람에...."
엄마의 말씀이다. 그게 뭔지 나도 알 것 같다.
그래. 뭐 어차피 아무도 불편하지 않다면 이대로 놔둘까. 아직 사진 언덕들은 앨범 갈피 갈피마다 무사하니까.
.
에이, 그래도 이번 주말에는 빈 앨범들을 사들고 가야겠다. 기억의 언덕에서 길을 좀 잃더라도, 아무래도 엄마보다야 내가 낫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