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 콩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드롱 Sep 12. 2023

오늘이 결혼식인데 드레스가 없다니

달콤살벌한 결혼식의 기억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결혼식 시작 한 시간 전이다.

결혼식의 신부는 바로 나다. 그런데 난 아직 민낯인데다 청바지에 티셔츠차림이다. 당연히 드레스도 준비 못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둑한 빈 교회에는 꽃 장식 하나 없이 썰렁하다. 이제 삼십 분 후 식이 시작된다는데! 주변을 둘러보는데 도움 청할 이는 아무도 없다. 식은땀이 흐른다. 


내가 10년 전에 몇 번을 반복해 꾸었던 꿈이다. 


결혼식이란게 나에게는 그렇게 부담이었다. 나는 소녀였을 때 부터 예쁜 드레스를 입고싶은 로망이 없었고, 딴 따따따 결혼식을 올리는 인형놀이도 별로 해 본 기억이 없다. 여자아이들은 다 핑크를 좋아한다지만 나는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결혼에 대한 환상도 없었다. 결혼식은 그냥 남들 보기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치뤄내는 부담스러운 행사일 뿐이었다. 흔히들 '스드메'(스튜디오사진+드레스+메이크업)는 여자를 위한 이벤트라고 할 만큼 즐긴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결혼 할 신랑은 생겼는데 이런 거사를 의논할 어른이 없었다. 나의 부모님은 가난한 예술가들이었고, 세상물정을 나보다 몰랐다. 경제적으로 부담을 드리기도 싫었고,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모님은 내게 진행상황을 자세히 묻지도 않으셨다. 아마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어서 더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다행히 그 즈음 나는 여차저차 돈을 벌고 있었다.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막 독립해 상수동의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았다. 압구정동 한 갤러리의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었고 동시에 일러스트를 그려서 싸이월드 스킨을 팔고 있었다. 한참 온 나라가 일촌 관계에 푹 빠져있던 시기였다. 일러스트가 제법 인기가 있어서 수익이 쏠쏠했고, 나 한사람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때 나는 정신적으로 고아같았다.


식장을 잡고 드레스를 맞추고, 스튜디오를 빌려 사진을 찍고, 예물 예단 등을 교환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큰 돈이 들었다. 식장 계약 후 이런 '스드메'를 예약하는게 평범한 수순이었다. 보통 축의금으로 식사비와 진행비를 충당한다는 것도 아예 몰랐다. 그저 겁이나고 막막했다.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서 너무 초라해보이긴 싫었다. 그날 만큼은 외롭고 힘든 사정을 들키기 싫었다. 예물이며 예단이며 간소하게 한다면 어떻게 어느 선이 적당한지 고민했다. 난생 처음으로 현실적인 조언과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몰랐다. 그때 결혼식의 의미, 설렘, 행복의 약속같은 건 나중 문제였다.


 그 이후에도, 드레스가 없거나 꽃이 없거나 사람이 없는 비슷한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그러나 현실의 결혼식은 걱정과 달리 잘 진행됐다. 꿈보다 현실이 훨씬 너그러웠다. 극도의 긴장감 덕에 나는 그날 인생 최고로 날씬했고, 드레스는 나름대로 잘 어울렸고 식장은 남들 그러듯이 반짝였으며, 나중에 말하기를 아빠는 내가 예뻐서 자랑스러웠다고 했다. (결혼식 관련 아빠에게 들은 유일한 코멘트다) 나는 활짝 웃으며 행복한 신부 연기를 완벽하게 해냈고 몰디브로 신혼여행까지 다녀왔다.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지만.









10년이 지난 지금은 더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 그런데 얼마 전 마흔 넘은 내 친구가 늦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전화로 그녀가 나즈막이 말했다. 


나 며칠 전에 결혼식 하는 꿈을 꿨어. 근데...드레스가 없는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아무에게도 말도 못하고 속앓이를 했던 그때는 울지 않았는데. 친구는 사업체를 만들고 한참 투자금이 들어갈 때라 돈을 아껴야한다. 그녀도 나처럼 부모님에게 기대지 않기로 한 터라 혼자서 어떻게든 결혼식을 치뤄내야 하는 것이다. 아끼는 친구가 똑같은 맘고생을 하는 것 같아 너무 속이 상했다. 누군가의 마음이 자세한 말 없이 이토록 그대로 전해지긴 처음이었다. 


하지만 다행이 B는 나보다 씩씩하고 낙천적이다. 그래도 걱정이 되긴 했던지 결혼식 꿈을 두 번 더 꾸었다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그 전 타임에 진행했던 신부에게 부탁해 드레스를 빌려입었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사람들이 일어나 나가려는 찰나, 그녀는 사람들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자자. 이제 시작할거예요. 다시 자리에 앉으세요. 그리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나가 마이크를 잡고 안내 방송까지 했다. "여러분, 가지마세요. 결혼식은 진행됩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길 부탁드려요!" 그녀는 꿈에서도 그녀답게 문제를 해결했다. 








며칠 후 그녀가 말했다.

 "나 드레스랑, 신발이랑 면사포 다 해서 28만원에 해결했어. 그거 사고 나니까 이제 드레스 없는 꿈은 안꾼다?"  그녀는 돈을 최대한 아껴서 자신의 사업자금에 보태기로 했다. 멋지다.



20년 지기 노처녀 내 친구가 드디어 결혼하는 날, 내가 도우미가 되기로 했다. 남들이 어찌봤든 내 결혼식에서 나는 웃고있었지만 속으론 아슬아슬 불안했던 스릴러 영화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내 친구의 모든 순간은  달달한 로코버전으로 마음에 꼬옥 담으리라 다짐해본다. 아마 그날 난 10년 전 내가 되어 많이 울고 웃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꽃을 찍는 아저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