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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드롱 Mar 04. 2022

왜, 예술 하시나요?

삶을 견디는 기술


야채가 가득 든 샌드위치를 와작와작 깨물어 먹으며 오늘도 생각한다.

‘내가 왜 살아있지?’ ‘뭔가 하지 않으면 안돼’ 라는 익숙한 불안감이 또 찾아온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할까? 그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지?




늘 상복처럼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퍼포먼스 아티스트가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항상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으로 다니는 그녀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작업을 하시나요?



지금 생각하면 당신은 왜 사느냐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행위예술’ 작업은 대부분, 결과물이 그럴듯하게 남는 것도 아니고 팔아서 돈을 챙길 수도 없는 분야다. 상스럽게 말하자면,,,예술이라는 간판 아래 미친놈 처럼 보이는 행동을 정색하고 선보이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의미화하는 나르시시스트들의 장르 랄까?(죄송)


그때 나는 미술대학 졸업 후의 진로를 고민하며 시니컬해진 24살이었고 예술가의 삶에대해 애증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갈등의 원인은 아무리 봐도 내 환경이었다. 나의 부모는 재능은 넘치지만 너무 순수(?)해서 돈을 못버는 예술가들이다. 나도 소위 최고라는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자식이 후배가 되었으니 부모가 롤모델이 될 수 밖에 없었는데, 가만 보니 특출난 재능이 반드시 사회적 인정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게 매우 당혹스러웠다. 돈 버는 능력은 여러가지 감각과 훈련이 필요한 별도의 장르라는 걸 그땐 알지 못했다. 정서적으로는 풍요해도 물질적 가난함은 결국 슬픔이다. 아름다운 음악과 글, 고상한 취향과 밥상머리에서 벌어지던 형이상학적 토론의 세계도 있었지만, 집세를 위해 이웃에게 돈을 빌리러 가는 엄마의 참담한 얼굴도 있었다. 그 대비는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불안하고 부조리했다.








무지개 빛깔로 염색을 하고 다니던 동기들, 누가누가 더 독특한가를 경쟁하는 듯한 미술대학 수업시간. 내 인생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 마다 엄마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기엔 내 모든 조건들이 너무 비슷했고, 가까웠다.

씨발 망했다. 라는 느낌이 엄습했다. 정신을 차리고 이 예술의 길이 내 것인지 아닌지 알아봐야 했다. 다른 길도 모색해봐야 했다. 먼저 가고 있는 선배는 과연 행복한가 물어보고 싶었다.

작업에 파고들 시간에 내가 대체 왜 그래야만 할까 부터 찾으니 귀에 들리는 예술에 대한 담론들이 다 허공에 뜬소리 같았다.


‘내 안에 아무도 관심없는 쓰레기를 구태여 끄집어내 대단한 듯 선보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대단한 예술가가 못될 바엔 차라리 길거리에 나가 쓰레기라도 줍는 편이 숭고하고 지구에도 그나마 이롭겠다.’



이런 생각으로 불쑥 던진,

듣기에 따라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그 질문에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삶을…견디려고.”




그녀의 잠긴 목소리는 어둡고 얼굴은 지쳐보였다. 그럼 그렇지. 그녀의 검은 옷은 인간의 시지프스적 삶을 애도하는 상복이구나.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것 같았다. 씁쓸했다.

동시에 나는 ‘와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 너무 불행해보이는 얼굴이야.’라고 속으로 외쳤다.


다른 건 몰라도 순수예술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견디는 것이 다라면 그 인생은 너무 불쌍하다.

나는 가능성이 많았고, 무엇보다 행복하고 싶었다.

돈도 많이 벌고, 주변에 우습게 보이기도 싫었고, 가능하면 사랑받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 대답은 무슨 저주처럼 아무리 떨치려 해도 20년이 넘게 머리에 각인된 문장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나이들고 회사도 다녀보고 애도 낳아보고 삶의 꿈과 현실의 차이에 경악하며 괴로워할 수록

그게 결국 나에게도 해당하는 진실의 문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데 반전이라면, 그 말이 결코 슬프거나 가엾은 체념의 말은 아니란 거다. 왜 난 오해했을까? 그건 오히려 희망의 말이었다.

 

대단한 것을 성취하며 사는 사람도

지리멸렬한 일상을 견디는 사람도 핵심적인 기술이 꼭 필요하다.

자신의 삶을 붙잡고 의미화 할 줄 아는 기술,

그것이 예술이라는 거였다.



자기 삶에 대한 작은 제사이자 놀이이자 의식이기도 하다.

그걸 뭐라고 이름 붙이든 상관없다.

바람을 느끼며 자전거를 타는 것이든,  SNS에 올리는 사진 한 장이든, 정성을 다 해 끓인 한 대접의 국이든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면 그보다 삶을 위로 하는 것은 없다.

대단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고행의 삶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겁게 의미화하는 기술보다 좋은 게 있을까? 내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어. 라고 스스로 느껴지기만 해도 사람은 충만감을 느낀다.


나는 오늘도 야채만 가득한 샌드위치를 먹으며 습관적 무의미의 점심시간을 견딘다.

그러자 머릿속에 서랍이 열리고 문장이 떠오른다.





예술을 해.
삶을 견디려면 아무 예술가나 되어라.





그래. 맛이 없다면 스케치라도 해야지. 속으로 대답한다.

그런 마음을 먹자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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