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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을 쏘다 Jan 03. 2020

사랑의 장난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예쁜 여자는 아니다.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 뒤쪽에는 나쁜 잠버릇이 달라붙어 있고, 나이도 모르긴 몰라도 이미 서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50미터 앞에서부터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100퍼센트의 여자인 것이다.



 사랑을 바라는 사람은 어느 날엔가 벼락같이 자신에게 사랑의 축복이 쏟아져 내릴 것이라 믿는다. 출근길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커피 향이 가득 찬 카페에서, 해가 산을 넘으며 붉은빛을 뿌리는 저녁 거리에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천사처럼, 완벽한, 100퍼센트의 그녀가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같은 음으로만 이루어진 악보처럼 지루하던 삶 가운데 강렬한 선율로 사랑이 나를 흔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혹은 너무나 완벽해서 그려볼 수조차 없었던 100퍼센트의 그녀가 찾아오는 일은 드물다.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책에 열중한 사이 들리는 목소리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보게 만드는 향기에서 그녀를 찾아보지만, 이는 허상일 뿐이다.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에게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랑이 다녀간다. 그러던 어느 날 골목에서 마주친 그녀에게 이끌려 그녀조차 모르는 은밀한 매력을 홀로 발견하게 되고, 그는 드디어 사랑의 장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상상이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서 어딘가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우디 앨런의 영화라도 보고, 호텔 바에 들러 칵테일이나 뭔가를 마신다. 잘되면 그 뒤에 그녀와 자게 될지도 모른다.

 가능성이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벌써 15미터 정도로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면 좋을까?



 이처럼 완벽한 그녀라면 나의 전생의 인연은 아닐까. 우리가 만나 커피를 마시거나 밥이라도 한 끼 먹고 나면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지 않을까. 천상에서 잔칫상을 놓고 서로를 희롱하던 신선과 선녀였던 것은 아닐까. 가문의 반대로 끝내 이어지지 못한 중세 비운의 연인은 아니었을까. 영겁의 시간을 가로질러 우리의 못다 이룬 바람이 드디어 이루어지려는 순간은 아닐까.



 그러나 그들의 기억의 빛은 너무나도 약하고, 그들의 언어는 이제 14년 전만큼 맑지 않다. 두 사람은 그냥 말없이 서로를 스쳐 지나, 그대로 사람들 틈으로 사라지고 만다.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보았어야 했던 것이다.



 일 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녀는 내 옆을 스쳐 가고 우리의 사랑은 쓰이지 않은 이야기처럼 망각 속으로 버려지고 만다. 그렇다. 상대가 100퍼센트의 여자라도, 나는 보잘것없는 남자라도,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말을 걸고 사랑을 맹세하는 것이 우습게 보일지라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만 사랑은 찾아오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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