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시작하는 1학년 엄마 생활
- 헉. 여보! 하임이 방과 후 끝나는 시간 지난 거 아니야?
- 그래? 몇 시에 끝나지??
- 3시 25분 아닌가. 잠깐만 찾아볼게.. 맞네.
- 지금 몇 신데?
- 지금 35분이야 어쩌지. 큰일 났다. 나 얼른 가볼게!
대변을 눈 둘째를 씻기고 있던 내게 남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와 묻더니 비가 오는 집 밖을 우산도 쓰지 않고 대번에 달려 나간다. 둘째의 물기를 닦이는 동안 휴대전화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뜬다.
- 여보세요?
- 하임이 어머니 되시죠? 하임이 방과 후가 끝났는데 부모님이 오시지 않았다고 해서요.
- 아 네네. 죄송해요. 지금 아빠가 막 데리러 나갔어요. 5분 정도면 갈 거예요.
-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 비슷한 번호로 온 부재중 전화가 하나 더 있다. 아마도 학교에서 한번 더 전화를 걸었는데 못 받았나 보다 하고 짐작한다. 남편과 딸아이가 1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빗속에서 이런저런 장난을 치며 오고 있나 보다 하고 있을 때쯤 현관문이 벌컥 열린다.
- 엄마!! 왜 내 전화 안 받아!!
- 어어 하임아 왔어. 미안미안.
- 엄마 안 와서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울먹거리며 이야기하는 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 아이고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 응 그래서 전화했는데 전화두 안 받고
- 에고 그랬구나. 방금 선생님 전화 오셨는데, 그전에는 하임이가 전화했나 보네.
- 응. 엄마가 전화 안 받아서 내가 교무실 찾아가서 말했어.
- 동생이 응가해서 엄마 옷에도 다 묻고 그래서 씻기느라 정신이 없었어. 씻길 때 전화가 와서 소리를 못 들었나 봐 미안. 이거 봐 그래서 엄마 윗도리도 다 벗고 나시만 입고 있어 으으 똥냄새~
미안한 마음에 장난을 치며 너스레를 떨었더니 아이가 눈물을 닦으며 품에 안겨 킥킥 웃는다.
무슨 일이 있거나 엄마랑 만나지 못하면 학교에 비치된 전화기로 전화하는 법을 알려주고 신신당부한 내 말이 무색하게 아이의 첫 전화를 받지 못했다. 무려 초등학교 입학 후 첫날이었는데 말이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어 미안하기도 하고 교무실까지 찾아간 것이 야무지고 기특해 꼭 안고 토닥여주었다.
아이의 입학 1주일 전 제주로 입도했다. 필요한 물건이 생길 때마다 짐을 뒤져 꺼내고 집에 있는 첫째, 갓난쟁이 둘째와 하루종일 씨름을 하다 보니 이사한 집 정리는 사치였다.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거실은 지뢰밭처럼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우리는 첫째가 학교에 가는 날만을 기다렸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는 것을 대비해(?) 집 앞에 딱 하나 있는 주 4일짜리 학원도 등록해 두었다. 그리고 드디어 첫째가 입학을 했고, 신나게 이삿짐 정리를 하다가 하교 시간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첫째가 크면서 점점 남편보다는 나를 찾았고, 그러다 보니 내가 첫째를 전담하고 남편이 둘째를 맡는 것으로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졌다. 나는 첫째의 등하교, 방과 후 등하교, 학원 등하원을 맡아 하루에 6번씩 발바닥에 불이 나게 들락 거렸고, 하교 시간이면 늘 가방을 던져두고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기다렸다.
이미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낸 선배엄마들의 말에 따르면 친구를 사귀려면 1학년 초가 골든타임이고, 놀이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라 예고했다. 안 그래도 이곳 1학년 아이들은 이미 병설 유치원에서 같이 지내다가 올라온 경우가 많아 이미 친한 무리가 형성되어 있었고, 아이가 "오늘 수업시간에 놀이터에 갔는데 다들 짝꿍이 있어서 혼자 놀았어" 하고 말할 때에는 슬그머니 걱정이 들었다. 안 그래도 한 반에 여학생들이 8명밖에 되지 않는데 무리에 끼지 못하면 어쩌나.
그래서 입학 후 매일 아이가 학교 운동장에서 실컷 놀 수 있도록 기다렸다. 덕분에 일주일쯤 지나자 인사하고 함께 노는 친구들도 생기고, 친구 엄마들과도 안면을 텄다. 해는 따뜻해도 한자리에 서서 제주의 바람을 맞고 있자니 몸이 춥고 으슬으슬했다. 집에 돌아와 카페인을 수혈하고, 소파에 기대 언 몸을 녹이며 잠시 휴대폰을 보다 보면 금방 또 데리러 갈 시간이 다가왔다.
남편은 남편대로 고생이었다. 둘째는 백일도 되기 전부터 통잠을 자는 아기였지만 요즘은 성장통이 있는 시기인지 새벽에 수차례 깨서 울거나 칭얼대는 밤이 많았다. 밤에 몇 번씩 깨며 둘째를 보느라 좀비상태인데 낮에도 내가 첫째 일정을 따라다니니 거의 하루 종일 둘째의 육아를 맡다시피 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니 이사 오고 걸린 감기가 지독히도 낫지 않아 컨디션이 좋은 날이 잘 없었다.
내가 첫째의 육아휴직을 했을 때 모습을 남편에게서 보았다. 아침이면 밤새 누적된 피곤과 좋지 않은 컨디션, 아픈 손목과 어깨, 옷에는 항상 아이가 게워놓은 토사물 얼룩과 냄새, 외출한 상대가 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게 되는 마음까지. 남편은 첫째 육아휴직 때 내 마음을 이제야 백 프로 이해하게 되었다며 미안해했고 나는 그 힘듦을 알기에 지금 고생 중인 남편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여보, 다른 사람들은 대체 애들의 1학년을
어떻게 보내는 거야?
아이가 입학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 남편이 물었다. 하루종일 왔다 갔다 매니저처럼 아이의 일정에 맞춰 사는데 어떻게 회사를 다니는 생활이 가능하냐는 질문이었다.
- 그러게. 그래서 회사 선배들이 유치원 다닐 때가 더 편할 때라고 했나 봐.
- 회사를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닌 것 같은데? 우린 지금 둘 다 집에 있는데도 이렇게 제 시간이 없는데 말이야.
- 그러게. 그래서인지 주변에 1학년 엄마들 육아휴직한 사람들이 많더라고. 맞벌이하는 집들은 아예 하원도우미를 쓰거나 중간에 빈 시간이 없게 학원을 돌리는 것 같고.
분명히 행복감은 충만했다. 출퇴근 스트레스도 없고, 그토록 원하던 마당 있는 주택에 살고 있는 것도 꿈만 같았다. 날씨 좋은 날 첫째와 나란히 킥보드를 타고 가는 길에는 나도 모르게 신이 나서 환호성을 질렀고, 오랜만에 느껴보는 스피드에 아이처럼 참을 수 없이 웃음이 절로 났다. 엉망인 모습이어도 아기를 안고 마당과 하늘을 내다보거나 개들과 마당에 앉아 바람을 느낄 때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가 않았다. 게다가 내가 힘들 때 바통을 받아 주거나 케어해 줄 수 있는 남편이 언제든 함께 있고, 같이 밥을 차려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떨 상대가 있다는 것이 정말 큰 의지가 되었다. 남편은 둘째와 사랑에 빠져서 거의 여성호르몬이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도 고민을 했었는데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며 매일같이 둘째를 안고 볼을 비볐다.
하지만 둘이 꿈꿨던 책 읽기, 글쓰기, 공부, 운동 계획은 기약이 없이 멀어져만 갔다. 남편도 나도 육아만 하다가 제주 생활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조금씩 생겨났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일단 저질러야 시작한다는 생각에 계속 배우고 싶었던 테니스 수업을 검색해 바로 등록했다.
첫째가 학교에 있는 오전 시간을 이용해 나는 월목, 남편은 화금에 20분의 수업을 듣고, 끝나면 각자의 자유 시간을 2시간씩 누리기로.
첫 테니스 수업을 듣던 날, 뭔가 모를 후련한 해방감이 벅차올랐다. 수업 시간 내내 자세를 배우고 공 몇 번 친 것뿐인데도 알 수 없는 활력이 솟아났고, 테니스장 근처의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내 모습이 요즘 세대들의 말을 빌리자면 갓생을 사는, 자기 효능감이 넘쳐흐르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운전을 해서 집에 돌아오던 길 내리막 도로에서는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선명한 바다 풍경에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고 감탄했다. 이사 당일보다 테니스 수업 첫날의 감흥이 더 클 지경이었다.
내가 정말 제주에 와있구나. 드디어.
제주에 내려오기 전부터 끊임없이 이사 준비를 하고, 이사를 하고, 24시간 내내 아이들을 살피고, 집안일을 하고 짐정리를 해야 했던 내게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임신과 출산으로 1년이 넘도록 하지 못했던 몸 쓰는 운동을 하고 다음날 찾아온 근육통마저 반가운 손님이었다.
4월이 되고 첫째가 혼자 등하교를 하게 되면 더 많은 시간이 생기고, 내게도 좀 더 시간이 생기겠지. 무엇을 더 해볼까, 제주 살이로 내 인생이 어떻게 조금씩 달라질까,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린다.
+ 다음 날 테니스 수업을 들은 남편도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걸어 테니스 수업을 등록해 줘서 너무 고맙다고. 정말 너무 좋다며 신나 했다. 내가 이사한 날보다 테니스 수업 첫날의 감흥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하자 남편이 "야 너도? 야 나두" 하고 농담을 건네며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육아에서의 해방감이 한몫했던 것 같다. ㅎㅎ
+ 첫째가 유일하게 늦게 오는 수요일마다 가고 싶었던 곳을 하나씩 들러 보기로 했다. 이번주에는 늘 눈독만 들였던 디앤디파트먼트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아름다운 플레이팅과 맛있는 커피, 깔끔하고 예쁜 인테리어와 물건들을 보니 눈도 마음도 어찌나 즐겁던지.
평소면 바글바글할 d 포토 스팟에도 아무도 없어 눈치 보지 않고 인증사진도 실컷 찍었다.